여자를 하늘 같이 여기는 서양국가에서 아직도 남존여비 사상이 기세를 부리는 것이 교향악단이다. 많이 나아졌지만 교향악단의 여자 단원들은 아직까지 마이너리티에 속하며 지휘자의 경우는 아예 손을 꼽을 정도다. 미국의 유수 75개 교향악단 중 여자가 상임지휘자인 경우는 단 3개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교향악단에서 여자 단원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러니 지휘자는 말할 것도 없다. 남성 위주의 고루한 전통을 지금까지도 끈질기게 지키고 있는 것이 163년 역사의 ‘비엔나 사운드’를 자랑하는 비엔나 필하모닉이다. 그래서 이 악단은 ‘멘즈 클럽’이라 불린다.
비엔나 필이 여론에 밀려 첫 여성 단원을 고용한 것이 1997년(체코 필도 마찬가지). 그것도 23년간 보조직으로 하프를 켜온 안나 렐케스를 비로소 정식 단원으로 고용한 것이었다(그녀는 2001년에 은퇴했다). 한 음악평론가는 “베를린 필에 여자 단원이 생기기란 여자 교황 나오는 것만큼이나 더디다”고 비아냥댔다.
2003년을 기준으로 비엔나 필에는 비올리스트와 하피스트 2명만이 여자인데 이는 전체 단원수의 2%. 베를린 필은 4%, 뉴욕 필은 40% 그리고 LA 필 경우 30% 정도가 여성 단원이다.
비엔나 필은 그래서 지난 2002년 3월 코스타메사를 방문했을 때 여자들의 피켓시위를 받기도 했었다. 비평가들은 이 악단이 “남성만의 교향악단이라야 소리도 다르고 연주도 다르다는 남성위주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고 비난한다. 비엔나 필이 단원 자체 운영기관이라는 점도 여자들이 더 뚫고 들어오기 힘든 이유 중 하나다.
최근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클래시컬 뮤직계에 일대 화제가 됐던 사람이 여류 지휘자 마린 알솝(사진)이다. 지난 7월 미 굴지의 교향악단인 볼티모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의 이사진이 알솝을 차기 상임지휘자로 선정, 발표하자 단원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알솝이 기술적으로 한계가 있으며 문제를 들을 줄 아는 귀가 없다”며 임명에 반대했는데 이런 근사한 이유 뒤에는 알솝이 여자라는 또 다른 이유가 숨어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미 유명 교향악단 사상 여자로서는 최초로 상임지휘자로 임명된 알솝은 바톤을 쥐기도 전에 이런 심한 반발을 받았는데 그녀는 그 때 “이것은 지휘자는 근접하기 어려운 외국어 액센트를 구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통념 탓이다”면서 “지금은 권위의 시대가 아니라 협력의 시대”라고 말했다. 이 문제는후에 알솝과 단원들간의 대화로 원만히 해결됐다.
맨해턴에서 태어난 마린 알솝(48)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기 뉴욕시티 발레의 콘서트 매스터이자 첼리스트여서 알솝은 말하기 전 음악부터 듣고 자랐다. 그녀는 9세 때 청소년 콘서트에 참석, 레너드 번스타인의 지휘를 보고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 뒤 번스타인은 알솝의 스승이 되었다.
처음에는 바이얼리니스트로 활동한 알솝은 20대 때 동료 연주자들에게 피자를 사주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연주시켜 지휘 연습을 했고 정규 지휘자 자리를 얻지 못하자 스윙밴드 등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자신의 앙상블인 콘코디아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지휘한 강철의 의지를 지닌 여자다.
알솝은 1988년 몇 차례 시도 끝에 탱글우드 오디션에 참가, 번스타인을 감격시키며 정식 지휘자의 길이 열렸다. 1993년부터 12년간 콜로라도 고향악단을 지휘했던 알솝은 브람스에서부터 현존 미국 작곡가의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레퍼터리를 구사하는 지휘자다. 음악계는 알솝을 ‘새 피요, 새 방향’이라 여기며 그녀의 BSO 지휘자 취임을 미 교향악단의 또 하나의 이정표로 치하하고 있다.
알솝의 지휘를 직접 목격하고 싶어 지난 20일 디즈니 콘서트 홀엘 갔다. 인상이 야무졌다. 단발에 검은 제복 스타일 상의 소매 끝에 빨간 천으로 액센트를 입힌 알솝은 등을 잔뜩 구부리고 안으로 음들을 빨아들이는 스타일로 지휘를 했다. 음들을 폭발적으로 내연시켰다.
토루 다케미추의 ‘영혼의 정원’과 호아킨 로드리고의 ‘아란후에즈의 콘체르토’에 이은 차이코프스키의 제5번 교향곡이 이 날의 절정. 비극적으로 로맨틱하면서도 격정적인 곡을 알솝은 악보 없이 얼굴을 붉혀가며 혼신의 힘을 다해 큰 제스처로 지휘했다. 정열과 박력, 볼륨과 화려함이 요동을 치는 듯했다. 여자라고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적 양을 못 퍼담을 줄 아느냐고 과시하는 것 같았다. 브라바 알솝!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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