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가면 우선 좋은 게 해가 짧아지고 어둠이 길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날씨가 소슬해서 일찍 찾아오는 밤에 편승해 칵테일 한 잔 마시기도아주 좋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세프템버 송’을 들으며 술기운에 취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센티해 보는 것도 이 계절에나 할 일이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가장 좋은 것은 LA 필하모닉이 겨울 시즌을 여는 것이다. 가을 밤에 디즈니 콘서트 홀에 앉아 클래시칼 음악을 들으면 몸과 마음에 묻은 홍진이 말끔히 세척되면서 내가 단정하고 숙연해진다.
그런데 LA 필의 이번 시즌은 ‘해방된 베토벤’(Beethoven Unbound)이라는 제하에 베토벤으로 시작해 베토벤으로 끝나 더 신난다. LA 필의 상임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은 시즌 동안 베토벤 교향곡 전 9곡을 지휘하고 줄리아드와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은 베토벤의 스트링 쿼텟을 연주한다.
살로넨도 말했듯이 베토벤(1770~1827)은 전 시대를 통해 가장 과격한 작곡가로 음악사의 인습과 전통을 과감히 파괴한 혁명가다. 베토벤은 자기 이후 모든 작곡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교향곡과 현악 4중주곡 등 음악의 모든 형태에 혁명을 가져온 사람이다. 베토벤을 흔히 악성이라고 부르는데 내 친구 C는 음악 얘기를 할 때면 베토벤은 제쳐놓는다. 왜냐하면 베토벤은 음악의 올림퍼스산 정상에 홀로 우뚝 선 거인이기 때문이다.
베토벤을 희랍의 신에 비유하자면 프로메테우스라 하겠다. 선견이라는 뜻의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제우스에게 반기를 들고 불을 훔쳐다 동굴 속 인간에게 준 권위에의 반항아다. 그는 베토벤이 귀족들 알기를 우습게 알 듯 제우스를 우습게 알았는데 불을 훔친 데 대한 벌로 코카서스산 벽에 쇠사슬로 묶여 매일 같이 자기 간을 파 먹으려드는 독수리에 의해 가슴의 피부가 찢겨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베토벤이 고전파 음악의 관행을 깨고 나이 30세에 귀가 멀어 자살까지 생각하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우리에게 강렬하고 심오한 음악을 준 것이 프로메테우스의 행동을 닮았다.
이기적이요 무례하고 성질이 고약했던 베토벤은 단구에 차림이 단정치 못한 추남이었다. 베토벤이 독립과 평등을 존중했던 까닭은 그가 프랑스와 미국 혁명과 함께 자랐기 때문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천성에다 사회적 환경이 베토벤이라는 음악의 혁명가를 만든 것이다.
그래서 베토벤은 자신이 민주적이요 계몽적이라 생각했던 나폴레옹을 존경해 교향곡 제3번‘에로이카’(9일 하오 2시 연주)를 나폴레옹에게 헌정했다. 이 교향곡은 그 때까지의 교향곡의 틀과 성질을 완전히 깨어버리고 교향곡 이라는 장르에 새옷을 입힌 곡이다. 그런데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자 배신감을 느끼고 교향곡의 표지를 뜯어내 찢어버렸다고 한다.
베토벤 하면 잊지 못할 것이 ‘하일리겐슈타트 유언’. 그가 1802년 가을 건강 때문에 묵고 있던 시골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쓴 유서다. 베토벤은 청각 상실로 인한 고뇌와 자살 의도를 얘기하며 그러나 오로지 예술에 대한 자신의 임무 때문에 자살 유혹을 극복한다고 적었다. 이런 얘기는 프랑스 감독 아벨 강스의 불후의 명작인 무성영화 ‘베토벤의 삶과 사랑’(The Life and Loves of Beethoven·1937)에서 잘 묘사되었다. 프랑스의 위대한 배우 하리 바우어가 베토벤으로 나오는데 그가 시골길을 걷다 비를 피해 나무 밑에 앉아 귀 대신 가슴으로 듣는 ‘전원’교향곡(13~16일 연주)의 악상들인 새소리, 종소리 및 폭포소리를 종이 위에 음표로 옮기는 장면이 감동적이다(강스는 베토벤의 생애 시간대를 뒤섞어 놓았다).
지난 1일 디즈니 홀에서 살로넨이 지휘하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1번과 제2번을 들었다. 제1번은 물론 아직 모차르트의 음색이 묻어 있지만 제2번만 해도 베토벤적 변형이 보인다. 살로넨은 제1번과 제2번 사이에 프랑스의 현대음악 작곡가 앙리 뒤티에의 무조적 ‘시간의 그림자’를 넣었는데 전 베토벤 시리즈를 통해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늘 아름답고 사뿐하면서도 나는 화살 같은 힘을 지닌 살로넨의 지휘는 장식을 지양한 간결하고 분명하면서도 공격적이다시피 정열적이었다.
연주 후 박수를 치면서 무대 위를 보니 새로 LA 필에 들어온 한국계 자니 리가 바이얼린을 들고 동료 단원들과 함께 청중을 마주하고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박흥진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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