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소리(31)를 처음 본 것은 그녀의 데뷔작인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에서였다. 그러나 이 영화는 남자 주인공 설경구의 영화이지 여배우의 영화는 아니다. 그녀가 나온 또 다른 영화 ‘바람난 가족’은 앙상블 캐스트의 영화이고 ‘효자동 이발사’는 역시 남자 주인공 송강호의 영화다.
내가 문소리의 연기에 가슴이 경직되도록 충격을 받은 것이 역시 이창동이 감독한 ‘오아시스’였다. 여기서 문소리는 중증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나와 피눈물 나는 연기를 했다.
혹자는 그녀의 연기를 오버액팅이라고도 하지만 영화 ‘괴물’에서 연쇄살인범 창녀로 나와 오스카상을 탄 샬리즈 테론의 연기가 오버액팅이지 문소리의 연기는 자기를 희생하는 용감한 것이었다. 문소리는 이 역으로 2002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문소리의 상대역으로 나온 설경구가 원체 연기를 잘 하는 데다가(내 생각엔 설경구는 한국 남자 배우중 최고의 연기파다) 한공주로 나온 문소리가 온 몸이 뒤틀린 장애인으로 나와 말까지 더듬어 이 여자가 문소리인지 바람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문소리가 비로소 혼자 영화를 짊어지고 가는 작품이 ‘사과’(Sa-Kwa)라고 하겠다. 나는 이 영화를 얼마 전 토론토 국제영화제(국제비평가상 수상)서 봤는데 문소리의 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야 정말 연기 잘 하는구나”하고 절로 감탄사가 나왔는데 문소리의 하나도 연기를 하지 않는 연기에 나는 황홀할 지경이었다. 한국서 내년 봄에 개봉될 이 영화로 최근 산세바츠찬 국제영화제서 신인작가상을 받은 강이관이 글을 쓰고 감독으로 데뷔한 ‘사과’는 사랑을 잃고 나서 자기 각성과 함께 바로 서는 인간으로 성숙하는 젊은 여인의 무척 평범한 이야기다.
29세난 회사원 현정(문소리)은 7년간 사귀던 애인 민석(이선균)과 함께 제주도로 놀러갔다가 느닷없이 버림을 받는다. 민석이 하는 말 “너를 사랑하다 보니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아.” 현정은 멀쩡한 대낮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빠져 울고 불고 E-메일 썼다 지우고 하면서 실연의 후유증에 시달린다.
이 때 현정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남자가 현정과 같은 빌딩서 일하는 회사원 상훈(김태우). 상훈은 표준형 모범인간인데 현정에게 꽃을 선사하고 명함을 주면서 집요하게 구애한다. 마음이 공허한 현정은 펑크난 타이어 땜질하듯 마지 못해 상훈과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현정은 서로 모든 것이 너무나 다른 상훈과는 도저히 맞지가 않아 그를 퇴짜 놓는다. 그런데도 죽어라 하고 매어 달리는 상훈의 정성이 지극한 데다 회사서 퇴출된 아버지와 합동한 어머니의 은근한 결혼 압력에 시달리던 현정은 상훈과 결혼해 버린다. 그리고 아기까지 낳지만 결국 현정은 상훈에게 이혼을 청한다.
실연이 사람의 감성과 인성에 미치는 영향을 단순하면서도 섬세하고 민감하게 다룬 이 드라마는 사랑의 상처를 너무 쉽게 다른 사랑으로 메우려는 것의 어리석음을 맵고 아프게 비판하고 있다. 연애를 한두 번 해본 사람들은 모두 겪었겠지만 우리는 어쩌다 실연을 하고 나면 그로 인해 가슴에 패인 구멍을 메우려고 사랑을 주우러 다니곤 한다. 현정도 도저히 혼자 있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상훈의 사랑을 주워다 민석의 사랑이 떠난 자리를 메운 것이다.
현정은 결혼 후 상훈에게 “나는 당신을 연애할 때보다 결혼 후에 더 사랑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데 이런 숙제에 대한 답 같은 자기 합리화의 말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다. 사랑은 “그럴 것 같아”라는 애매모호한 자세로는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현정이 자기 옆에 누운 상훈을 뒤에서 끌어안은 뒤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자기 방식대로 밖에 사랑할 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의 후렴 같은 말이다.
이 영화는 오로지 문소리의 태양을 받아 잔물결을 일으키는 호수의 표면 같은 미묘한 연기 때문에 보통 영화의 틀을 벗어났다. 철딱서니 없던 여자가 사랑을 잃고 나서야 자아를 깨닫고 반듯하고 튼튼한 인간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문소리는 티내지 않고 본능적으로 해낸다. 참으로 시원한 연기다. 문소리는 예쁜 배우는 아니다. 연기로 자기를 아름답게 만드는 문소리. 그녀에게는 확실히 뭔가 있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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