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 상오 8시30분. 히로시마 상공에 섬광이 번쩍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검은 비가 내렸다.
미군 B-29폭격기 ‘에놀라 게이’가 투하한 원폭 ‘리틀 보이’로 즉사한 히로시마 시민은 7만명. 이로부터 몇달 내 또 다른 7만명이 방사능 오염으로 사망했다. 히로시마가 잿더미로 바뀐 지 사흘 뒤인 9일 미군 폭격기는 제2의 원폭 ‘패트 맨’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은 끝났다.
미국의 핵의 오만과 이로 인한 세계의 맏형역 자임의 계기가 된 히로시마 원폭투하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찬반론이 있지만 역사는 승자의 편이어서 그것은 필요했던 재난으로 여겨지고 있다. 필요론자들은 원폭투하는 더 많은 인명 피해를 줄이고 전쟁을 조기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원폭투하 대신 연합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했더라면 피아간에 수백만명의 인명 피해가 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원자탄 개발계획인 맨해턴 프로젝트의 과학 총책임자였던 J.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년 11월 “폭탄은 본질적으로 패배한 적에게 투하됐다”면서 “트루만 대통령은 소련과 일본을 분점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핵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처음 사용된 핵이 요즘 와서 새삼 국제 정치의 뜨거운 감자로 등장하고 있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도 궁극적으로는 사담의 핵 보유를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라크를 잡고 나니 이번에는 이란이 핵 개발을 선언해 미국의 심기를 불편케 만들고 있다.
북한의 김정일은 핵 폭탄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과거 스탈린이 그랬듯이 김정일은 이것을 정권유지용 공갈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세계가 인간의 오만과 우매의 산물인 핵을 놓고 겨루는 모양이 마치 아이들의 불장난을 보는 것 같다.
핵에 관한 좋은 영화들로는 일본의 쇼헤이 이마무라 감독의 ‘검은 비’(Black Rain)와 ABC-TV가 1983년에 방영한 ‘그 날 이후’(The Day After)가 있다. 핵의 가공성에 몸서리가 쳐지는 작품들이다. 엄격한 이들 영화와는 달리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는 핵의 우발적 전쟁 가능성을 신랄하게 풍자한 뛰어난 블랙 코미디다.
핵 투하의 암울하고 긴 잔영을 사랑의 수용 불가능성과 상징적으로 연계시킨 초현실적 분위기의 프랑스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1959)은 내면을 뒤흔들어 놓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반전영화다. 마게리트 뒤라가 시적인 각본을 쓰고 알랭 르네가 감독한 이 영화는 히로시마라는 범세계적 파멸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두 남녀의 하루 남짓한 사랑의 이야기다.
영화는 호텔 뉴 히로시마에서 두 남녀가 벗은 상반신을 서로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은 포옹한 채 핵을 맞아 응고된 연인들을 연상시키는데 나신 위를 가득 덮은 땀방울이 핵의 재 같다. 여자를 끌어안은 남자는 단조로운 톤으로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 것도 보지 않았어”라는 독백을 계속 한다. 히로시마의 공포와 아픔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이 리라.
여자(에마뉘엘 리바)는 히로시마로 평화에 관한 영화를 찍으러 온 프랑스인 배우요 남자(에이지 오카다)는 히로시마에 사는 일본인 건축가. 내일이면 떠나야 할 여자는 2차대전 때 고향 느베르에서 겪은 점령군 독일 병사와의 쓰라린 사랑 때문에 또 다른 살육의 장소인 히로시마에서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리고 기억에 시달리고 망각을 한탄한다. 영화에서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두 사람은 모두 기혼자지만 이들에 대한 그 어떤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둘은 밤새 히로시마 거리를 걸으며 남자는 여자에게 일주일만, 사흘만 더 머무르라고 조른다(네온이 반짝이는 텅 빈 히로시마의 모습을 찍은 흑백 촬영이 검소하다). 둘이 들른 강가 카페에서 여자는 자신의 적과의 사랑과 연인의 죽음 그리고 이 사랑때문에 받은 치욕적 처벌을 고백한다. 그리고 여자는 과거의 고통과 미래에의 고뇌 사이에 갇힌 현재 때문에 고문을 받듯 괴로워 한다.
남자가 여자의 두 팔을 아프도록 붙잡고 “내 이름은 히로시마, 당신 이름은 느베르”라고 말하면서 영화는 사랑의 교착상태로 끝난다. 파괴와 적의의 장소는 사랑마저도 허용치 않는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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