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철 파리. 흐린 토요일 저녁. 공중전화 부스 안의 잔느 모로의 감은 눈을 화면 가득히 클로스업하던 카메라가 그녀의 헤픈 듯 두툼한 입술로 내려가면서 모로의 가라앉은 음성이 흘러나온다. “나는 더 이상 못 참겠어요. 사랑해요. 해야 해요. 난 당신을 안 떠날 거예요 쥘리앙.” 이 때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핏이 비가 조로 불길하면서도 로맨틱한 영화의 분위기를 전조한다.
내가 이렇게 시작되는 프랑스 영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Elevator to the Gallows·1957)를 본 것은 중학생 때 광화문에 근처에 있던 아카데미 극장에서였다. 난 그 때 단숨에 모로에게 사로잡혔었다. 컬을 한 금발 머리에 하이힐을 신은 그녀가 투피스 상의의 칼러를 올린 채 자기 연인을 찾아 밤새 비오는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저런 여자를 갖기 위해서 살인마저 저지르는 쥘리앙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나의 프랑스판 베티 데이비스인 모로는 피곤해 보여 더욱 유혹적이다. 그늘진 얼굴, 미소 잃은 눈동자, 양끝이 아래로 처진 농염한 윗입술 그리고 약간 거슬리는 듯한 나른한 음성. 그녀는 마치 세상을 다 산 여자처럼 나태해 보여 사람을 녹작지근하게 만든다. 입천장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초컬릿의 잔해 같은 여자다.
어두운 분위기와 심리적 깊이를 갖춘 치정살인 스릴러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는 모로를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다. 루이 말르가 24세 때 만든 첫 영화로 말르와 모로는 후에 애인이 되었다. 모로의 연기가 눈부신 또 다른 영화는 프랑솨 트뤼포의 ‘쥘르와 짐’이 있지만 그녀는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에서의 연기로 대뜸 전설적 존재가 되었다.
공중전화로 쥘리앙(모리스 모네)에게 군수품 제조회사 사장인 나이 먹은 자기 남편 시몽을 죽이라고 조르던 플로랑스(모로)는 이어 쥘리앙에게 몇 시냐고 묻는다. 하오 7시. 플로랑스와 쥘리앙은 30분 후 둘이 늘 가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는다.
시몽의 부하직원으로 낙하산 부대 출신인 쥘리앙은 밧줄을 이용해서 자기 사무실 위층에 있는 사장실에 들어가 권총으로 시몽을 살해한다(이 장면에서 창 밖으로 검은 고양이가 지나간다). 쥘리앙이 회사 앞에 세워둔 신형 컨버터블에 시동을 걸고 떠나려는 순간 자기 사무실 창밖에 걸린 밧줄이 눈에 띈다. 밧줄을 회수하러 쥘리앙이 다시 회사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순간 경비원이 전원을 끄고 퇴근한다. 꼼짝없이 갇힌 쥘리앙.
이 때부터 쥘리앙이 엘리베이터에서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 긴장감 가득한 장면과 쥘리앙을 찾아 텅 빈 파리 시내를 밤새 걸어다니는 플로랑스의 허무한 모습이 교차된다. 그리고 열쇠가 꽂혀 있는 컨버터블을 쥘리앙의 회사 앞 꽃집 소녀 베로니크와 그의 불량배 애인 루이가 훔쳐 타고 신나게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대단히 절제된 영화로 플로랑스의 발자국 소리와 경찰 차의 사이렌 소리 같은 실제 음을 빼고 영화는 거의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이 침묵을 깨는 또 다른 소리가 독백으로 전달되는 플로랑스의 내면 언어들. 플로랑스는 “밤새 미친 여자처럼 찾아 다녔어요, 발이 차가워요”라며 자신의 피곤과 절망감을 토해낸다.
또 하나 다른 소리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재즈 트럼핏 소리. 데이비스가 파리를 방문했을 때 말르의 부탁을 받고 즉흥적으로 작곡했는데 이 고독한 트럼핏 연주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는 이렇게 무드 짙은 것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앙리 드카에가 찍은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밤의 파리의 풍경이 황홀하다.
영화 속에서 플로랑스와 쥘리앙은 한번도 직접 만나지 않는다. 둘은 영화 끝에 물 속의 현상된 사진에서 포옹한 채 재 상봉한다. 그리고 플로랑스는 사진을 만지면서 “10년, 20년. 난 이제부터 늙을거야. 이제부터 잠들 거야. 그러나 우리는 함께야. 우릴 떼어 놓을 수는 없어”라고 독백한다.
나는 지난 2001년 9월 토론토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모로의 말을 전해들은 바 있다. 9.11테러가 나자 영화제 개최측은 영화제 중단을 검토했는데 이때 영화제에 참석한 모로는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삶 안에 있는 에너지를 죽이려 한다고 해서 왜 우리가 살기를 멈춰야 합니까”라고 말했었다. 나는 그때 이 말을 듣고 그녀의 고매한 정신에 깊이 감동했었다. 새로 프린트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가 29일부터 로열(310-477-5581)과 플레이하우스(626-844-6500)에서 상영된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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