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성격 탓인지 검고 어두운 것을 좋아한다. 흰 색보다 검은 색이 더 좋고 개인 날보다 흐린 날(비가 오면 더 좋고)이 더 좋다.
초등학교 때 미술시간에 모든 색을 다 섞으면 검은 색이 된다는 것을 배웠듯이 블랙은 모든 것을 수용하는 무궁무진한 우주의 색이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착한 것과 악한 것 그리고 어리석은 것과 부끄러운 것 등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일들을 흡수해 중화시키는 색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태초처럼 모든 것이 무가 되니 세상의 짐이 버거운 마음이 은폐하기에 딱 알맞은 색이다. 그래서 나 같은 게으름뱅이들이 좋아할 색이다.
얼마 전 월스트릿 저널을 읽으니 3년여간 동면하던 블랙이 올 가을 패션에 컴백할 것이라며 이미 올해 초 프라다와 샤넬 같은 패션 선구자들이 각종 블랙 의상을 선보였다고 보도했다. 니만 마커스와 앤 테일러 같은 소매업체들도 가을을 위해 지금 블랙 의류를 쌓아 놓고 있다고 한다.
신문은 블랙의 컴백은 그동안 유행한 밝은 색에 싫증이 난 소비자들의 욕구에 따른 것이라며 온갖 색깔을 다 사용한 패션 디자이너들이 새 색깔을 만들기 위해서 색깔의 총체인 블랙으로 돌아간 것이라는 전문가의 말을 인용했다. 디자이너들은 블랙을 진지하고 고급스럽고 자신감 있으며 또 본질적이며 세련된 익명성의 색깔이라고 말한다.
색깔과 더불어 사는 화가는 블랙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해 박혜숙씨에게 물었다. 그는 “블랙은 빨아들이는 색으로 그 옆에 있으면 모든 색이 살아난다”면서 “블랙은 밝음의 깊이를 더하는 색이요 근본으로 돌아가는 색깔을 초월한 색”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나는 블랙이 퇴폐적이요 염세적이며 감관을 흥분시키는 색깔로 느껴진다. 그것은 악과 공포, 비밀과 저주 그리고 죽음과 잠적의 색깔이다.
내가 ‘검은 영화’를 뜻하는 필름 느와르(Film Noir)를 좋아하는 까닭도 이 장르에는 이런 모든 어두운 요소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들은 대부분 어수룩한 남자가 ‘블랙 위도우’ 같은 요부의 간계에 휘말려 들어 범죄를 저지른 뒤 결국 모두 황천으로 가는 내용이다. 세상을 랄리팝처럼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비웃는 영화로 그 절망감이 쓸개 씹는 맛이다.
한국 사람들은 장례식 때 흰 옷을 입지만 서양 사람들은 검은 옷을 입는다. 내가 보기엔 죽음과 슬픔에는 블랙이 더 잘 어울린다. 저승에 색깔이 있다면 블랙일 터인데 그래서 잉그마르 버그만의 저승사자도 ‘제7인의 봉인’에서 흑의를 입고 십자군 전쟁서 귀향하는 기사와 체스를 두었다. 기독교의 종교화에 나오는 마귀들도 모두 블랙 차림이다. 그리고 마귀의 사돈의 팔촌격인 드라큘라도 블랙 망토를 즐겨 입는다.
블랙을 입어서 가장 멋진 남자는 누구이고 가장 아름다운 여자는 누구일까. 말론 블랜도가 반항의 상징인 블랙 가죽재킷을 입고 모터사이클을 탄 무뢰한으로 나온 ‘난폭자’(The Wild One)의 매력은 블랙의 야수적 유혹 때문이었다. 골체미가 눈부신 오드리 헵번이 소매 없는 블랙 드레스를 입고 긴 검은 장갑을 낀 채 긴 물부리를 문 고급 창녀로 나온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노라면 그녀의 흰 피부와 검은 옷이 따가운 대조를 이루며 이 창녀를 선녀처럼 만들어 놓는다.
블랙은 음침한 매력이 있어서 노래와 영화 제목에도 많이 쓰여졌다. 노래로 유명한 것은 롤링 스톤즈가 부르는 ‘페인트 잇 블랙.’ 리드 싱어 믹 재거는 ‘자기 속을 들여다보니 자기 가슴이 블랙이라며 자신의 붉은 문이 블랙이 되면 그 때 자기는 사라져 없어져 사실과 직면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너의 온 세상이 블랙일 때 엄연히 맞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고 노래한다. 블랙이 현실 도피의 색깔임을 깨닫게 한다.
제목에 블랙이 붙은 영화 중에서 내가 권하는 영화는 강렬한 삼바 리듬과 광란의 춤이 있는 ‘검은 오르피어스’(Black Orpheus)다. 글룩이 오페라로도 만든 오르피어스와 유리디체의 전설을 축제 중인 리오로 옮긴 사랑과 죽음의 명화다. 올 가을 사람들이 정말 블랙을 입고 다니는지 지켜봐야겠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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