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노래했는데 그럴듯한 뜻풀이다. 또 영화 ‘이수’에서는 파리의 한 재즈 바 흑인 여가수가 브람스의 제3번 교향곡 제3악장의 멜랑콜리한 주제에 맞춰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지요”라고 그것의 무의미를 넋두리하고 있다.
왜 사랑의 노래들은 이처럼 모두 슬프고 절망적인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열이 몽환하는 도깨비 장난에 지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기껏해야 순간적 진실에 지나지 않는 사랑을 세상에서 영원하겠다고들 다짐하다 결국 울고불고 속앓이를 하고 만다.
영육을 말끔히 소모시키는 사랑이란 이 세상에서 설자리가 없는 저 세상적인 것일진대 그것을 지키고자 한다면 사랑의 당사자들이 죽어 세상을 초월하는 수밖에 없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얼마 전 바그너의 정열적이요 아름답고 슬픈 금지된 사랑과 죽음에의 찬미인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를 보고 새삼 저 세상의 사랑에 대한 소유권을 깨달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너무도 강렬하고 심오해 도저히 이 세상의 육체적 테두리 안에서는 이뤄질 수가 없어 둘은 죽음을 통해 결합된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제약에서 해방돼 선험적인 공간으로 올라가 불멸의 사랑을 완성한다. 이 오페라는 사랑만을 위해 살려고 죽는 두 연인의 영원을 향한 초월과 해탈의 여정을 동양사상과 로맨티시즘으로 채색한 궁극적 사랑의 찬가이다. 그렇다고 이 오페라가 영적인 것만은 아니다. 육감적으로도 굉장히 에로틱해 두 연인의 사랑의 환희와 고뇌를 함께 열병 앓다보면 그야말로 생사의 경계를 오락가락 하는 쾌감을 맛보게 된다.
충격과 경이감에 빠져들었던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의 이번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은 가수들이 무대와 객석 사이를 왕래하며 노래하고 살로넨이 LA필을 지휘하는 콘서트 형태. ‘트리스탄 프로젝트’(피터 셀라스 연출)라는 이름으로 전 3막을 주말 사흘에 걸쳐 매일 1막씩 공연했다. 나는 지난 10일, 11일과 12일에 걸쳐 관람했는데 매일 오페라에 앞서 이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베르크와 드뷔시와 사리아호의 음악이 각기 연주됐다. ‘프로젝트’라는 이름은 이번 공연이 여러 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기 때문.
아직 미완성인 이번 공연서 처음에는 거의 거부감이 일만큼 새로웠던 것은 비디오 아티스트 빌 비올라의 오페라 영상해설. 무대 정면 위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투영된 영상들은 오페라 내용을 그대로 옮기는 대신 이 비극의 내적 상황과 두 연인의 내면 감정을 상징적으로 묘사했다.
비올라는 사막과 숲, ‘에덴동산’과 바다 그리고 촛불과 화염과 수많은 물방울 등을 사용해 가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겪는 사랑과 죽음에의 동경을 때로 공포영화처럼 또 때로는 신화처럼 으스스하면서도 신비롭게 영상화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육적인 격정을 겪을 때 화면 위의 배우들은 전신 나체가 되어 사랑을 방해하는 것을 벗어버리더니 이어 수중으로 잠겨 서서히 유영하면서 정염을 식힌다. 특히 비올라는 불과 물을 많이 사용해 두 연인의 정열과 정화를 뜨겁고 신성하게 묘사, 불 세례를 받고 물 목욕을 하는 환희를 체험했다.
그리고 트리스탄(클리프턴 포비스)과 이졸데(크리스틴 브루어가 풍부한 성량으로 노래를 잘 불렀다)가 제2막에서 “사랑의 밤이여 우리 위에 내리소서”라며 러브 듀엣을 부를 때는 카메라가 화면의 클로스업된 두 남녀 배우의 얼굴을 서서히 회전촬영하는 히치콕 기법을 쓰기도 했다. 바그너의 뮤직 비디오라고나 할까. 로맨틱하고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두 주인공의 영혼의 모습을 육안으로 목격한 이상야릇한 영적 경험이었다.
이 세상에 사랑의 노래도 많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랑의 노래가 이 오페라 제3막 맨 마지막에 나오는 이졸데의 긴 사랑의 탄식 ‘리베스토트’(사랑의 죽음)이다. 부상을 당한 트리스탄이 이졸데의 품에 안겨 숨진 뒤(사진) 이졸데가 노래한다. 자신의 심장과 영혼을 압박하는 슬픔과 죽음에의 동경을 피를 토해내듯 읊조리는 노래를 듣노라면 격정에 숨이 막힌다.
그리고 이졸데는 님의 옆에 쓰러져 죽는데 이때 제1, 2막과 달리 수직으로 설치된 화면(영원으로 가는 문) 위에 두 연인이 차례로 잿빛 해저에서 푸른빛 하늘로 서서히 떠오르는 모습이 투영된다. 어느새 최면에 걸린 나의 몸과 정신도 두 연인과 함께 승천하고 있었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초현실적 경험이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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