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토론토영화제에서 본 50여편의 영화 중 내게 가장 깊은 감동을 준 것은 스페인 영화 ‘마음속의 바다’(The Sea Inside)였다. 탐 크루즈 주연으로 리메이크 된 ‘눈을 떠라’의 원작을 만든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32)가 감독하고 지금 세계적 배우로 떠오르고 있는 하비에르 바르뎀(35)이 주연한 이 영화는 안락사를 위해 투쟁한 전신불구자 라몬 삼페드로의 실화이다.
청년 시절 고향인 스페인 북부 갈리시아 지방에서 수영 사고로 목 아래가 완전히 마비가 된 뒤로 침대생활을 30년간 하다 안락사를 선택한 라몬의 얘기를 아름답고 감정적이며 또 원숙하게 묘사한 훌륭한 영화다. 이 영화는 죽음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삶을 찬양하고 또 인간 의지를 확인하는 영혼을 고양시키는 영화로 유머와 페이소스가 고루 배어 있어 나는 웃다가 울면서 영화를 봤었다.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케 하는 작품인데 특히 라몬역의 바르뎀의 파괴적으로 강력한 연기가 심금을 울린다. 그는 일부 과거회상 및 상상의 장면을 제외하고는 영화 내내 침대에 누워 눈과 얼굴 표정과 대사로만 연기를 한다. 인간적인 죽음을 위해 투쟁하는 라몬의 고뇌와 욕망과 좌절감 그리고 강철 같은 의지가 바르뎀의 얼굴 연기에 의해 찬란하게 표현되고 있다.
몹시 아름다운 것은 라몬의 영혼이 열린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 바다와 들과 산 위를 빠른 속도로 비상하는 장면. 보는 사람도 그의 영혼과 함께 비상의 열락을 만끽하게 되는데 아메나바르가 작곡한 음악이 비상의 속도와 희열을 마음껏 북돋워주고 있다. 라몬은 1998년 자기를 사랑하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자살했다.
지난 월요일 베벌리힐스의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마음속의 바다’를 위한 파티에서 바르뎀과 아메나바르를 만났다. 연말이 되면 LA 영화비평가협회를 위한 이런 종류의 파티가 계속 열리는데 나는 파티 애니멀이 아니어서 자주 참석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르뎀을 꼭 만나고 싶었다. 나는 씩씩하게 생긴 바르뎀과 악수를 나눈 뒤 얼른 기념사진부터 한 장 찍고 대화를 나눴다.
내가 ‘밤이 오기 전에’(2000)로 이미 한번 오스카 주연상 후보에 오른 바르뎀에게 “당신 내년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를 것이 틀림없으니 내기를 해도 좋다”고 추켜세웠더니 바르뎀은 “그러냐. 참 좋네”라며 흐뭇해했다. 바르뎀은 농담꾼에 명랑하고 활기가 넘쳤는데 라몬역을 위해 하루 다섯 시간은 분장 그리고 10시간은 침대에 누워 연기를 하느라 고생했다고. 그는 또 역을 위해 전신마비자들을 치료하는 병원을 여러 번 찾아가 관찰했다고 말했다.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고 밝힌 바르뎀은 내 질문에 자기는 안락사를 찬성한다고 답했다. 바르뎀은 “자기 생명은 자기 것”이라더니 “폭격으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 한 사람은 자유행위의 주체”라고 유럽인답게 부시를 비난하기를 잊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영화를 보고 울었다고 말했더니 바르뎀은 “나도 당신처럼 각본을 읽고 울었다”고 맞장구를 쳤다.
안락사를 찬성하기는 아메나바르도 마찬가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영화제작에 대한 반발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인터넷에 차라리 라몬의 어머니 얘기를 만들라는 제의 외에는 가톨릭계나 시민이 모두 잠잠했었다”고 답했다. 그에 따르면 라몬의 자살을 도와준 여인은 단 하루 옥살이를 하고 나왔다는 것. 3,000여시민들의 처벌을 하지 말라는 청원의 효과라고 한다. 야무지게 생긴 아메나바르는 라몬의 TV 인터뷰와 자서전을 읽고 영화화를 결심했다면서 라몬의 가족들이 영화를 보고 만족해 한 것이 큰 위로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좋은 영화라면 어떤 장르와 장소를 불문하고 만들고 찾아가겠지만 할리웃에 거주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안락사는 인간적인 죽음을 원하는 불치환자인 당사자들과 생명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종교 및 윤리원칙론자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논쟁되고 있는 매우 미묘한 명제이다. 세계적으로 안락사를 인정하는 국가는 네덜랜드와 벨기에뿐이다. 미국에서는 오리건주가 이를 인정하고 있다.
안락사 지지단체인 헴록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 성인들은 2대1로 안락사를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연 30년간을 침대에 누워서라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도 찬성자 중 한사람이다. ‘마음속의 바다’는 12월17일에 개봉된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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