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런던 코벤트 가든의 로열 오페라측이 여름에 공연할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 주연할 소프라노 데보라 보이트(43)를 뚱보(220파운드)라는 이유로 뒤늦게 퇴짜를 놓아 오페라계가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오페라계는 외모가 먼저냐 아니면 노래가 먼저냐는 문제를 놓고 찬반 토론이 요란했었다.
나는 그 때만 해도 오페라 가수가 노래만 잘 하면 됐지 체중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얼마 전 로스앤젤레스 오페라가 공연한 비제의 ‘카르멘’을 보고 완전히 바뀌었다. 오페라는 시각과 청각예술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 절감했다. 내가 이런 깨달음을 하게 된 까닭은 카르멘으로 나온 미국인 소프라노 캐서린 말피타노(56) 때문이었다. 결정적인 미스 캐스팅이었다.
세빌리아의 담배공장 여공인 집시 요부 카르멘 하면 어깨까지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검은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요염한 미모 그리고 늘씬한 몸매의 정열 덩어리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카르멘이야말로 끈끈한 흡인력으로 남자를 유혹해 노리개로 삼은 뒤 씹던 껌 뱉듯 버리는 겁나는 여자다. 그 희생자가 어수룩한 하사관 호세였다. 필름 느와르 영화에서 남자 잡던 치명적 여인인 리티 헤이워드나 에이바 가드너는 모두 카르멘의 후배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말피타노는 아무리 봐주려 해도 펄펄 끓는 피와 관능미로 화냥기를 하수처럼 쏟아내는 본능의 여인 카르멘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나는 일부러 눈을 그로부터 외면하고 노래만 들으려고 애를 썼는데 그렇다고 말피타노가 노래를 잘 부르는 것도 아니어서 공연히 눈만 피곤했다.
말피타노는 맨발로 춤을 추면서 호세를 열심히 유혹했는데(사진) 그가 술집에서 춤을 추는 이 장면은 LA타임스 말대로 희화에 가까웠다. 말피타노의 나이 든 얼굴과 다소 비대한 체중이 자꾸 카르멘의 자극적인 모습과 교차되면서 나는 누가 저런 여자 때문에 칼부림을 한단 말인가 라고 자문을 했다. 이날 무대에 선 호세역의 이탈리안 테너 마리오 말라니니도 사랑에 눈이 먼 총각 하사관으로서는 너무 점잖은 데다가 나이까지 들어 보여 중늙은이들의 ‘카르멘’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노래도 그저 무난한 편이었다.
나이 먹은 카르멘 모습은 어제 개봉된 영화 ‘칼라스는 영원하다’(Callas Forever)에서도 불 수 있다. 여기서는 프랑스 배우 화니 아르당(55)이 칼라스로 나와 은퇴했다가 오페라 ‘카르멘’을 영화로 찍으면서 일종의 컴백을 한다. 칼라스는 립싱크로 자신의 옛날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할머니 카르멘 같다.
세상이 경박해져 젊음과 날씬한 몸을 숭배한다고들 하지만 이번 말피타노의 경험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페병으로 죽어 가는 미미(‘라보엠’)와 비올레타(‘라트라비아타’)를 바그너의 악극에 알맞는 성량과 몸집을 지닌 가수가 노래한다는 것은 꼴불견이라는 한 음악 저술가의 말에 수긍이 간다.
그런데 최근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공연한 ‘라보엠’에서 미미로 뚱뚱한 루스 밴 스웬슨이 나왔는데 비평가들로부터 노래 잘했다고 칭찬을 들었다. 대표적 뚱보 여가수로는 보이트 외에 제인 이글렌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바그너의 ‘발퀴레’의 주인공 지클린데 역에 어울릴 성량과 몸을 지닌 소프라노들이다.
프랑스 작곡가가 지은 최고의 스페인 음악이라는 말을 듣는 ‘카르멘’은 유명한 전주곡과 간주곡 그리고 카르멘과 호세와 에스카밀리요가 각기 부르는 ‘하바네라’와 ‘꽃의 노래’와 ‘투우사의 노래’ 등 우리 귀에 익은 아리아들이 있는 인기작품이다. 오페라의 단골 주제인 사랑과 죽음이 있는 데다 하늘도 무시하고 또 죽어도 거짓말을 못하는 자유 혼의 여인 카르멘의 정열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고 화끈한 작품이다. 육욕과 살인이 있어 1875년 3월 파리서 초연됐을 때 퇴폐작이라고 비평가들로부터 뭇매를 맞았었다.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원래 인기작이어서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할리웃 최초의 검은 여신이라 불렸던 도로시 댄드리지가 주연한 뮤지컬 ‘카르멘 존스’(1954). 옅은 초컬릿색 피부를 지닌 팔등신 미녀 도로시가 터질 듯한 관능미를 으스대듯 발산한 재미있는 영화다(노래는 마릴린 혼). 호세로는 칼립소 가수 해리 벨라폰테가 나온다.
오페라 ‘카르멘’은 내일 하오 2시 마지막 공연이 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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