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마다 9월초가 되면 토론토로 영화 여행을 떠난다. 토론토 국제영화제(TIFF)에 참석한 것이 올해로 어느덧 다섯 번째. 혼자 하는 여행의 불안한 고독감을 저작하면서 전세계의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는 영화제 참석은 이제 내겐 하나의 연례 성지순례처럼 되었다(관계기사 위크엔드판).
눈에 바이진을 넣어가며 모두 45편의 영화를 봤다. LA의 시사회서 볼 수 있는 미 메이저 영화들은 제쳐놓고 주로 외국어 영화들을 선택했다. 외국어 영화의 미국시장 점유율은 0.5% 미만. 영화제가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는 예술성이 강한 외국어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나 같은 영화광에겐 더 없는 기쁨이다. 헝가리, 벨기에, 세네갈, 이스라엘 및 오스트리아와 홀랜드 영화들을 골라 보느라 쥐가 구멍 드나들 듯 이 스크린 저 스크린을 찾아다니다 보면 저녁에는 몸이 완전히 녹초가 되곤 했다.
아침에 기상해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저녁 늦게까지 하루에 5~6편씩 영화를 보는 일이 마치 논산훈련소의 일과를 연상케 했다. 영화를 보면서 조는 사람들과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 같은 기자들. 친절한 자원봉사자들의 인사에 “피곤하다”고 답하면 “모두들 그 말을 한다”며 웃는다.
그러나 이런 전쟁을 치르는 듯한 고단함은 ‘마음속의 바다’와 ‘카페 빛’과 같은 좋은 영화를 보면서 말끔히 해소된다. 내가 본 영화 중 큰 감동을 준 영화는 5~6편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한국영화는 김기덕의 ‘빈집’등 모두 4편이 출품됐는데 ‘빈집’은 비평가들의 칭찬을 받았다. 출품된 250여편의 장편영화들 중에서 매일 볼 것들을 고른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순전히 프로그램 책에 의존해야 하는데 또뽑기 하는 식이다. 그러나 자기가 고른 영화의 시작을 기다리고 다음날 볼 영화를 고르는 일은 스릴마저 있다.
몇 개의 극장 중 시사회가 가장 많이 열리는 시네플렉스 오데온이 있는 토론토 다운타운의 매뉴라이프 빌딩은 영과 블러어 스트릿 부근에 있다. 영 스트릿은 서울 명동거리를 연상케 하는 복잡한 거리로 끼니는 주로 이 곳의 식당에서 때우곤 했다.
밥을 먹으러 거리로 나오다 보면 하루 종일 영화를 보려고 장사진을 친 관객들을 보게 된다.‘잠옷 바람으로 영화 보러 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토론토니안들은 영화광들이다. 웬만한 영화는 거의 다 표가 매진되는데 그래서 토론토 영화제의 진짜 스타는 관객이라고 한다.
영화는 기자와 영화 관계자들을 위한 것과 일반 관객용으로 나뉘어 상영된다. 프레스와 인더스트리용 시사회에 입장하려고 줄을 서 있으면 어느 영화가 좋았고 어느 영화가 나빴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나는 가끔 이 귀동냥을 근거로 내가 볼 영화를 고르기도 했다. 고다르와 후 시아오-시엔과 우스마네 셈베네 같은 원로들의 영화와 다른 영화제서 화제가 됐던 영화들은 어김없이 초만원을 이루곤 했다. 그래서 이들 영화를 보려면 그 전에 본 영화가 끝나자마자 상영관으로 달려가야 한다. 조금 늦으면 문전 퇴짜를 당하기 때문이다.
토론토 영화제는 오스카상 후보감들이 첫 선을 보이는 전시장이자 북미 시장에로의 길목 구실을 하는 중요한 영화제다. 이 영화제가 질량면에서 베를린 영화제 등을 앞서고 있는데도 다른 영화제와 달리 비교적 조용히 치러지고 있는 까닭은 영화제가 칸처럼 화려한 스타 위주가 아닌 데다가 비경쟁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 분별 있는 영화제다.
그런데 나는 이번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경험을 했다. 토론토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7시에 호텔 방의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울리더니 14층에서 화재경보가 울렸으니 투숙객은 모두 계단을 이용해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나는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계단을 밟고 로비로 내려가는 대피객들 틈에 합류했다. 문득 빌 머리가 나온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Lost in Translation)의 호텔 화재 대피장면이 떠올랐다. “야, 영화 좋아하다 보니 영화 같은 경험을 다 하는구나”하며 혼자 히죽 웃었다. 화재경보는 영화처럼 별 것 아니었다.
센티멘탈 저니인 혼자여행을 하다보면 잠시나마 자기 모든 인연과의 단절이 주는 막대한 자유와 해방감 때문에 마음이 어수서해지곤 한다. 게다가 호텔방이라는 것이 너무 냉정해 불면에 시달리게 된다. 나는 매일밤 호텔방에서 캐나디안 위스키를 마시며 이 불면을 달래보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이 불면 때문에 나는 열흘간 빨간 눈으로 영화를 봐야했다.
마침내 영화제가 끝나면서 안도감마저 느꼈다. 그런데 또 한편 아쉬움이 남는다. 컴 세프템버!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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