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시절에 단체로 강당에 모여서 마약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마약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마약은 우리 몸에 엔돌핀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복용했을 때 즉시 기분이 좋아지는데, 그게 바로 가장 큰 문제다. 엔돌핀을 비롯해서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는 것들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스스로 만드는 능력을 상실해버리기 때문에, 장거리 달리기를 하더라도 마약을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서 엔돌핀이 생성되어 고통을 덜 느끼게 되는 것과는 달리, 마약 중독자는 계속 그 고통스러운 상태가 가중되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소리나 코끝을 스쳐가는 바람에 괜히 기분이 좋아본 기억이 있는가? 엔돌핀이 돌아서 그런거다. 마약 중독자가 되면 마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없다’
무서운 내용이었다. 1마일, 그러니까 1,600미터를 뛰다보면 한 500~600미터 지점에 이르렀을 때가 가장 숨도 턱에 차고 힘들고, 그 고비를 지나고 나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게 1,600미터를 완주할 수 있는데, 계속 점점 더 죽을 것 같이 힘든 상태에서 뛰어야 한다니 등골이 오싹했다. 대학에 진학했을 때 친구들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마약만 그렇겠니. 무엇이든 공짜로 자꾸 주어지기 시작하면 스스로 창조해내는 능력을 상실하는 건 사람의 본성 아니겠어. 창조의 시작은 갈망이라는데, 무엇을 갈망하는 욕구가 없어진다면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그 친구는 그렇게 쉽게 말로 뱉았다.
아는 후배 중에 피아노 반주를 열심히 해서 돈을 꽤 버는 후배가 있는데, 변호사와 결혼해서 넉넉하게 살고 있는 그 후배는 항상 말버릇처럼 남편에게 절대로 내가 얼마를 버는지를 알리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내가 왜? 라고 되묻자, 그는 자기가 얼마를 버는지를 알면 남편이 분명히 변호사 직업을 때려치우고 백수로 탱탱히 놀 것이라고 했다. 내가, 에이, 설마…라고 말하자, 그 후배는 주변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돈 잘 버는 부인을 둔 남편들이 얼마나 쉽게 게을러지고 무능력해지는지를 주변의 사례를 들어 설명해 주었다.
그 후배의 말에 의하면 멀쩡하게 사회적 능력을 인정받던 사람들도 자신이 일을 안 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되는 순간부터 놀 궁리, 돈 쓸 궁리만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피아노 치는 딸을 둔 학부형이라며 여자분이 전화를 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나이의 딸이, 어렸을 때는 피아노를 꽤 잘 치는 편에 속해서 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그랬지만, 딸아이의 선생이 동부로 이사를 간 뒤로는 여러 선생을 전전했는데 잘 적응을 못하고 그 선생만 그리워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학생과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선생들의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냐고 물었더니, 예전 선생은 여기는 이렇게 해라, 저기는 저렇게 해라, 라고 일일이 말해줘서 그렇게만 하면 됐는데, 다른 선생들은 얘기를 해주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고 했다. 피아노를 한 번 쳐보라고 하고, 이 부분은 저 부분보다 크게 쳐야할까, 작게 쳐야할까? 왜 그렇다고 생각하지? 등등 물었지만 학생은 몰라요 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어머니는 예전 선생처럼 훌륭한 선생을 찾기 힘들다며 한숨을 쉬었다.
문득 마약 중독자에 대해 고등학교 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났다. 따님은 지금 마약중독 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안 해도 되는 것은 하기 싫은 게 사람인데, 스스로 깨닫고 익혀야 할 정보가 항상 저절로 주어졌으니, 그 학생은 스스로 무엇인가를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해왔고 그 결과 생각하기 싫어지고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주입식으로 온갖 세세한 것까지 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라고 말해주는 선생에게서 배우면 어린 나이에 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또래보다 앞서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마약의 힘으로 잠시 반짝하던 사람이 약 기운이 떨어지면 제구실을 못하는 것처럼, 아이에게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박탈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는 교육은 잘 못 되었다고 생각한다.
진도는 조금 느리게 나가겠지만, 그래서 또래들에 비해 뒤지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아이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고 아이가 자신의 판단과 의지대로 피아노를 치게 하는 선생이 아이에게 장거리를 좀 더 고통없이 좋은 성적으로 완주할 수 있게 도와주는 선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학생을 보며, 혹시 지금 내 생활에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있어서 나를 안주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새라 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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