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달 남짓한 사이 할리웃의 저명한 영화음악 작곡가 3명이 잇달아 타계했다. 이들은 모두 할리웃 황금기 걸작들의 영화음악을 작곡한 원로들로 유명 고전음악 작곡자에 못지 않은 영향을 미 음악계에 남겼다. 그런데도 이들의 사망에 관해 별로 아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월 스트릿 저널도 지적했듯이 영화음악인들을 상업주의에 영혼을 팔아먹은 사람들로 여기는 미 고전음악계의 풍토 때문이다.
세 사람 중 지난 7월21일 제리 골드스미스가 75세로 제일 먼저 사망했다. 그는 ‘오멘’으로 오스카상을 받았는데 최근까지 활동하며 ‘차이나타운’ ‘에일리언’ ‘L.A. 칸피덴셜’ 등 총 170여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모두 13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던 골드스미스는 ‘벤-허‘의 음악을 지은 미클로사 로자로부터 영화음악 작곡을 배웠다. 대부분의 옛날 영화음악 작곡가들이 그렇듯이 골드스미스도 클래시칼 음악으로 기초를 닦았는데 그는 영화음악 외에도 실내악과 성악곡도 작곡했다.
지난달 9일 92세로 타계한 데이빗 락신은 그의 이름과 동의어가 되다시피 한 영화음악 ‘로라’로 영화팬들의 청각 속에 남아 있는 사람이다. 실종된 로라(진 티어니)의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데이나 앤드루스)가 거실에 걸린 그녀의 대형 초상화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 이 영화의 비감미가 넘치는 음악은 귀기마저 서린 신비한 매력을 지녔다. 이 주제음악은 후에 자니 머서가 쓴 시적 가사와 함께 노래로 불러지면서 지금까지도 팝의 스탠다드로 사랑을 받고 있다.
락신은 아놀드 쇤버그에게 사사했는데 그는 영화음악과 함께 많은 관현악과 실내악 및 발레와 무대음악 등을 작곡했다.
지난달 18일 82세로 캘리포니아 오하이에서 작고한 엘머 번스틴은 그의 이름은 몰라도 그가 작곡한 웨스턴 ‘황야의 7인’의 주제음악으로 늘 기억될 사람이다. 나는 대학생 때 서울 피카딜리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율 브린너와 스티브 매퀸 등 7인의 건맨들이 대형 화면을 가로지르며 말을 달리는 첫 장면을 배경으로 흘러나오던 박진하고 강건하며 하늘로 치솟는 듯한 리듬과 멜로디에 단숨에 빨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딴딴따란 딴따딴따란 따란~따라라란”하며 신나게 출렁이는 음악이 영화의 전모를 뚜렷하게 상징해 주는 대표적 경우이다. 이 음악은 처음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한 번스틴이 오디션을 통해 알게 된 아론 코플랜드의 발레곡에서 영감을 얻어 지었다.
사망할 때까지 200여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반세기간 미 영화음악계의 큰 별자리를 지켜온 번스틴은 모두 14번 오스카상 후보에 올랐었으나 ‘철저히 신식인 몰리’로 단 한번 상을 받았다. 번스틴의 또 다른 유명한 영화음악은 그가 처음으로 영화음악에 재즈를 도입한 ‘황금의 팔’. 재즈 드러머가 꿈인 전문 도박사 프랭크 시나트라가 마약 중독자로 나온 이 영화의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오프닝 크레딧 장면에 나오는 음악은 아찔하도록 선정적이요 야수적이다. 그리고 역시 그가 작곡한 ‘앨라배마에서 생긴 일’의 크레딧 장면 음악은 최고의 타이틀 음악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나는 번스틴을 지난해 1월에 만난 적이 있다. LA 영화비평가협회가 매년 선정하는 영화 각 부문 베스트에서 번스틴이 작곡한 ‘천국에서 먼 곳’의 음악이 뽑혀 그가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였다.
시상식이 있기 전 칵테일 파티에서 번스틴을 본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내가 대학생 때 서울서 ‘황야의 7인’을 봤을 때 나는 처음부터 곧 바로 당신의 음악에 반했었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백발단구에 마음씨 좋은 아저씨 모습의 번스틴은 “네 친절한 말이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는데 나의 기념사진 한 장 찍자는 제의에 선뜻 응해 주었었다(사진).
나는 이어 번스틴에게 “당신의 장수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음악활동의 장수비결을 물었던 것인데 번스틴은 자신의 생명의 장수에 관한 물음으로 생각했었던 것 같다. 건강 얘기를 하기에 내 질문의 본 뜻을 말했더니 “아 그러냐”면서 “특별한 비결은 없고 그저 처음부터 영화에 직접 개입해 영화 만드는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한다”고 알려 주었다.
수상 소감에서 번스틴은 “10년 전 당신들이 준 생애업적상을 받은 내가 아직도 활동하는 사람으로 이 자리에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다”며 즐거워했었다. 나는 그때 생명력과 낙천성으로 가득한 그가 앞으로 한 10년간은 더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의 음악만 남았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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