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최초로 언어와 체계적인 서술방식을 제공했을 뿐 아니라 혁신적 기술들을 창조적으로 사용해 영화를 무대극의 한정적인 전통으로부터 해방시킨 사람이 무성영화 감독 D.W. 그리피스(1875~1948)다. 그는 오늘날의 영화를 있게 한 뛰어난 예술가이자 영화인이요 기술자였는데 그리피스를 언급 않고는 미 영화사를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학교에서 영화를 공부할 때도 처음으로 거론되는 이름이 그의 것이다. 물론 그 전에도 영화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처음으로 영화답게 만든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리피스를 미국 영화의 시조로 삼고 있다. 내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돼 LACC에서 영화사를 야학할 때도 교수는 그리피스부터 가르쳤었다.
그리피스가 미 영화사의 태두라고 한다면 미국 영화의 기원이라고 부를 작품은 그가 1915년에 만든 3시간짜리 무성영화 ‘국가의 탄생’(The Birth of a Nation)이다. 남북전쟁 당시 미 북부와 남부의 두 가정을 중심으로 이야기되는 이 영화는 미국이라는 합중국을 비로소 탄생시킨 이 전쟁을 둘러싼 모든 역사를 대담하고 광범위하게 기록한 대하 서사극이다.
지금 다시 봐도 경탄을 금치 못할 전쟁장면과 링컨 암살장면(사진) 등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역사의 현장에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릴리안 기쉬, 도널드 크리습, 미리암 쿠퍼 등 뒤에 명배우들이 된 사람들이 나오는 이 영화는 사실성과 함께 감정도 풍부한 멜로 드라마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도 야학할 때 대강의실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압도감을 생생히 기억한다.
기술과 내용과 연기 등 모든 면에서 혁신적이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역사와 예술과 영화의 하나의 큰 업적인 ‘국가의 탄생’은 영화를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인데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 영화를 백악관 시사실에 본 뒤 “번개로 쓴 역사”라고 감탄했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전대미문의 제작비(10만달러)에 1인당 2달러라는 입장료를 내야 했는데도 빅히트를 했다.
그러나 미영화사의 교본이라 할 ‘국가의 탄생’은 예술적으로는 위대한 성취라는 찬양을 받는 반면 극단적으로 인종차별적인 작품이라는 오명이 늘 따라 붙는다. 여기 나오는 흑인들은 모두 어릿광대가 아니면 강간범 같은 범죄자나 야바위꾼들로 묘사됐는데 얼굴에 검은 칠을 한 백인 배우들이 의원들로 나와 의사당에서 튀긴 닭과 수박을 먹거나 백인여자를 겁탈하려는 장면은 흑인이 아닌 나마저도 외면을 하게 만든다. 그리피스는 영화에서 흑인들을 처벌하는 쿠 클럭스 클랜 단원들을 영웅으로 묘사했는데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됐을 때 이런 인종차별적 내용 때문에 큰 소요까지 일어났었다.
어떤 도시들은 아예 상영조차 안 했는데 켄터키 태생인 그리피스의 가족이 남북전쟁 후 국가 재건 과정에서 가운이 크게 기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왜 쿠 클럭스 클랜을 영웅화했는가를 짐자케 된다. 그래서 ‘국가의 탄생’은 위대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개봉 후로는 지금까지 좀처럼 극장에서 일반 관객을 상대로 재상영되지 않고 있다. 특히 흑인들이 영화 상영을 결사반대하고 있는데 흑백 사이를 더욱 이간시키고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증오범죄를 야기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최근 ‘국가의 탄생’의 극장상영 시도가 무산된 것은 지난 9일이었다. 페어팩스에 있는 무성영화 전용관인 사일런트 무비 디어터의 주인 찰리 러스트만은 이 영화를 이 날 상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뉴스가 LA타임스에 의해 보도된 뒤 전화와 E메일로 러스트만을 해치고 극장을 파괴하겠다는 협박이 쇄도, 러스트만이 상영을 취소한 것. 그런데 러스트만은 4년 전에도 영화 상영을 시도했다가 역시 같은 이유로 취소했었다.
‘국가의 탄생’은 만든지 근 1세기가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이렇게 흑백 갈등의 불씨를 품고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도 한 번 볼만하다(DVD와 비디오로 나와 있다).
그리피스의 일생은 형제 감독인 이탈리아의 파올로와 비토리오 타비아니가 만든 ‘굿 모닝 바빌론’(Good Morning Babylon·1987)에서 흥미 있게 묘사됐다. 그런데 그리피스는 말년에 영화계로부터 버림받은 채 고독하게 1948년 7월 지금 할리웃에 있는 닉커박커 호텔 로비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다. 히트작 없는 사람은 가차없이 버리는 할리웃의 비정함을 증거하는 죽음이 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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