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국장이 치러지는 배우 출신의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며(부시는 어쩌면 그렇게 레이건을 흉내낼까) 정치에서는 A학점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배우로서는 C학점짜리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관계서적을 들춰보니 1930년대 중반부터 30년간의 할리웃 생활에서 나온 영화가 총 53편. 그런데 그 중 변변한 영화라고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나는 그의 영화를 여러 편 봤지만 그의 모습이나 연기가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그리고 아무 특색 없이 잘 생긴 얼굴과 감미로운 음성을 지닌 레이건은 범속한 배우였다. 그가 주연한 영화들은 거의 모두가 B급 영화였고 몇 편 안 되는 A급 영화에서는 조연을 한 무미건조한 배우였다.
나만 레이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해 LA 영화비평가협회 동료회원인 해리엣에게 물어봤다. 해리엣은 “레이건은 뛰어난 연기력을 지니지 못했던 그저 무난한 배우로 그의 최고 연기는 정치였다”고 말한다.
라디오 스포츠 아나운서 출신의 레이건은 1937년 워너 브라더스와 전속 계약을 맺고 할리웃에 진출했다. 그는 로맨스 영화와 웨스턴, 드라마와 코미디 및 전쟁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나왔는데 대부분이 우수마발과도 같은 것들. 나는 웨스턴에서 레이건을 많이 봤는데 한심한 ‘법과 질서’(1953·사진)에서부터 괜찮은 ‘샌타 페 트레일’(1940)과 ‘몬태나의 여목장주’(1954) 등 여러편의 웨스턴에 나왔었다. 에롤 플린의 조연으로 나온 ‘샌타 페 트레일’에서는 젊은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로 나왔고 바브라 스탠윅의 상대로 나온 ‘몬태나의-’에서의 연기는 그로서는 호연이었다.
레이건을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는 ‘누트 로크니, 올 아메리칸’(1949)이다. 여기서 그는 실제로 노터데임 대학의 비운의 풋볼선수였던 조지 깁으로 나왔는데 좋은 연기를 했고 이 영화로 그에게 ‘기퍼’라는 별명이 붙게됐다. 이것과 함께 레이건의 또 다른 걸작(?)은 1차대전 직전의 미 중서부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의 드라마인 ‘킹스 로우’(1942)이다. 여기서 그는 못된 의사에 의해 불필요하게 두 다리 절단수술을 받는데 그가 수술 후 “내 나머지 부분은 어디 있어”라고 내지른 비명은 후에 그의 자서전 제목으로도 쓰여졌다.
레이건의 두 아내는 모두 배우들이었다. 3류 희극 ‘브라더 랫’(1938)에서 공연한 제인 와이맨이 첫번째 아내. 와이맨은 ‘자니 벨린다’(1948)로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연기파다. 그가 죽기까지 그를 정성껏 돌본 아내 낸시 데이비스와는 전쟁영화 ‘해군의 악녀’(1957)에서 딱 한번 공연했는데 따분한 영화다.
지금까지도 레이건의 조롱거리로 남아 있는 영화가 ‘본조의 취침시간’(1951). 레이건은 유전병 연구차 침팬지를 키우는 대학 교수로 나왔는데 소문처럼 그렇게 나쁜 코미디는 아니다. 레이건은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인기가 하락하자 TV로 재생을 시도했다. 그는 여러 편의 드라마와 웨스턴 시리즈의 호스트를 맡고 또 출연도 했지만 이미 저물어버린 인기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레이건은 1947~1952년 그리고 1959년에 영화배우노조위원장을 지냈는데 그는 이 경험에서 정치 맛을 봤다. 레이건은 매카시즘의 광풍이 일던 1940년대 후반 FBI의 밀고자이기도 했다. 그는 1947년 미하원의 비미국적 행위 조사위 청문회에 출두, 래리 팍스와 알렉산더 낙스 같은 영화인들이 공산주의자임을 확인해 이들은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이건의 영화는 그의 마지막 작품 ‘살인자들’(The Killers·1964)이다. 여기서 레이건은 연기 생애 처음으로 악역인 범죄단 두목으로 나와 자기 정부 앤지 디킨슨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긴다. 결국 그는 리 마빈의 총에 맞아 죽는데 레이건은 그 뒤로도 내내 이 영화에 나온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레이건은 이 영화 2년뒤 가주지사가 됐다. 헤밍웨이의 글이 원작인 이 영화는 당초 TV용으로 만들어졌으나 폭력 때문에 극장용으로 개봉됐었다. 같은 내용으로 버트 랭카스터가 나온 동명영화와 함께 DVD로 출시됐다.
레이건의 죽음이 왕의 죽음을 방불케 한다. 21발의 조포와 국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죽으면 그만인 것을.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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