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라 부르는 레닌그라드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였고 러시아 혁명의 발상지다. 러시아를 근대화시킨 계몽군주 표트르 대제가 세운 레닌그라드는 2차대전의 가장 비극적인 격전지 중 하나였다.
1941년 6월 독일이 러시아를 기습한지 얼마 안돼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하고 이 역사적 도시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 들어갔다. 러시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레닌그라드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점령함으로써 소련의 정기를 꺾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이 포위작전은 1941년 7월 말에 시작해 독일군이 패퇴하던 1944년 1월 말까지 900일간 계속됐는데 그 과정에서 300만 시민의 3분의1이 기아와 질병으로 숨졌다. 유난히 애국심이 강한 러시아 국민들은 적의 공습과 포화 그리고 혹한과 배고픔을 견디어내며 독일군에 저항했는데 이 레닌그라드 결사항전은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졌다. ‘시네마 파라디조’를 감독한 이탈리아의 주제페 토나토레는 니콜 키드만을 기용, 또 다른 레닌그라드 영화를 만들 예정이다.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의 제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쇼스타코비치가 자신의 고향에 바치는 승전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처음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포위됐을 때 탈출하라는 당국의 지시를 무시하고 자원 소방수(사진)로 일하며 이 교향곡을 작곡했다. 적의 공습이 있을 때면 악보를 챙겨 방공호로 피신했다고 하는데 3악장까지는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하고 마지막 4악장은 가족과 함께 피신했던 임시수도 쿠이비셰프에서 썼다.
이 교향곡은 1942년 3월 임시수도에서 초연됐고 이어 8월9일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됐다. 이때 급조된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는데 소련군은 연주회장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특공작전까지 폈다고 한다. 쿠이비셰프 초연에 이어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런던과 뉴욕에서 연주되면서 전세계의 대 히틀러 투쟁의 상징음악이 되었었다.
그런데 쇼스타코비치는 후에 자신의 이 승리와 생존의 교향곡에 관해 “이 곡은 나치의 파시즘에 대항 투쟁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테러와 노예상태 그리고 영혼의 속박에 대한 음악”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쇼스타코비치가 자기를 지독히도 못살게군 독재자 스탈린을 지목해 한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의 변덕 때문에 20년간 위험한 정치적 부침의 삶을 살며 고생했었다. 그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1934년 초연된 그의 오페라 ‘므첸스키의 레이디 맥베스’였다. 비평가와 청중의 큰 호응을 받은 이 오페라를 스탈린이 본 것은 1936년 모스크바 공연 때. 그런데 스탈린은 공연도 끝나기 전에 퇴장했고 곧 이어 당기관지 프라우다가 작품을 타락한 것이라고 맹공격을 하면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박해가 시작됐다.
당시 비밀경찰에 체포돼 감옥에 갈 각오까지 했던 쇼스타코비치가 스탈린에 대한 사죄용으로 작곡한 교향곡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대답’이라는 희극적인 부제가 붙은 제5번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후반 내내 통치세력의 자의에 따라 자유와 핍박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는 겉으로는 정부의 말을 따르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제 뜻을 굽히지 않았는데 전문가들은 그의 음악을 해석할 때 이같은 이중적 의미를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주시간 80분짜리의 어마어마한 질량을 지닌 ‘레닌그라드’ 교향곡을 들으려면 전쟁을 맞을 각오와 준비를 해야 좋다. 강열하고 압도적으로 궁극적 희열을 맛보게 되지만 방심하면 음악의 힘에 밀려 녹초가 될 수도 있다. 지난 21일 디즈니 콘서트홀로 LA필이 연주하는 이 교향곡을 들으러 갔다. 신작 작곡중인 살로넨을 대신해 모스크바 필의 상임지휘자를 지낸 바실리 시나이스키가 바톤을 들었다. 매우 정열적인 지휘였다.
목가적 분위기에 이어 참기 힘들만큼 장시간 계속해 반복되는 행군리듬의 ‘침공’ 주제가 마침내 풀 오케스트라의 울부짖음으로 끝나는 1악장부터 다시 이 1악장의 승리의 주제를 최대한의 효과로 불태우는 4악장에 이르기까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레닌그라드’ 교향곡 CD로 좋은 것은 발레리 게르기에프 지휘로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로테르담 필이 함께 연주한 필립스(Philips) 판이 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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