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새파랗게 젊은 신성일이 나온 액션 멜로드라마 ‘위험한 청춘’(1966)을 광화문에 있는 개봉관 아카데미 극장에서 본 것은 대학생 때였다. 카바레 가드 신성일은 자기 누나(문정숙)를 농락한 플레이보이 허장강에게 앙갚음을 하기 위해 허장강의 여동생(문희)을 꾀어 임신을 시킨다. 그러나 신성일은 문희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녀로부터 뺨까지 얻어 맞으며 오히려 사랑의 포로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뒷골목 사나이들의 주먹질과 순수한 사랑과 베드신 그리고 트위스트 김의 익살 등이 고루 섞인 재미있는 흑백 시네마스코프 영화였다.
이 영화를 만든 정창화 감독(74·사진)이 얼마 전 뜻밖에도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정 감독은 “몇년 전 한국서 아내와 함께 샌디에고 인근 라호야로 이사왔다”면서 “같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 얘기나 나누자고 전화를 걸었다”며 말을 건넸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고 놀랍고 반가웠다. 국산·외국산을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던 그 옛날 내가 스크린으로 알던 한국영화의 산 증인의 음성을 긴 세월 너머 듣자니 내 소년 영화광시절의 추억이 파도를 일으켰다. 우리는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정감독은 액션영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영화계에 이 장르를 구축한 장본인이다. 4반세기의 그의 영화 생애중 53편의 작품 가운데 38편이 액션영화다. 정 감독은 과거 일본 영화를 답습한 느리고 말 많은 멜로드라마 위주의 한국 영화가 할리웃 영화와 맞설 수 있는 길은 액션영화라고 판단, 생애 대부분 이 장르를 천착했다. 황해와 박노식이 주먹다짐을 하는 ‘노다지’(1961)와 남궁원이 칼을 휘두르는 ‘황혼의 검객’(1967) 및 ‘위험한 청춘’등은 서로 인물이나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액션이 작렬하는 작품들이다. 액션영화의 대부라고 불렸던 그는 액션영화를 “어른들의 꿈과 공상을 대신 실현해 주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감독은 이 액션영화 감독이라는 상표 때문에 당시 한국비평가들과 첨단의 영화인들로부터 냉대를 받았다고 고백했다. 소위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괄시를 받았지만 그는 늘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었고 영화의 평가는 관객이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지켜왔다. 활발한 활동과 상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감독이 그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잊혀진 감독이 되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정감독이 액션영화 연출가로서 진가를 마음껏 과시한 것은 홍콩에서였다. 1967년 그의 액션 연출에 감탄한 쇼 브라더스의 란란 쇼 사장이 정 감독을 홍콩으로 초청, 전속계약을 맺으면서 그는 홍콩 액션영화의 독보적 존재로 군림하게 된다. 여기서 만든 그의 대표작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은 미국으로 수출된 최초의 홍콩영화로 개봉 첫주 흥행 1위에 오른 기록을 남겼다. 그는 10년간의 홍콩생활(후에 골든 하베스트로 이적)에서 모두 11편의 액션 영화를 만들었다.
이소룡의 ‘정무문’과 재키 챈의 ‘취권’ 그리고 존 우의 ‘영웅 본색’ 등은 모두 정 감독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들이다. 정 감독은 홍콩에 있을 때 하루 3시간만 자면서 홍콩 감독들의 영화와 무술에 관한 각종 자료를 공부할 정도로 직업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그는 “액션장면 연출기법을 알란 래드가 나온 ‘셰인’에서 배웠다”면서 “당시 영화를 상영하던 단성사 주인에게 사정해 필름을 빌려다 밤새 빠른 편집을 공부하고 이튿날 새벽에 영화를 돌려주었다”고 회상했다.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보고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정 감독의 동시대 감독은 신상옥과 김지미씨의 남편이었던 고 홍성기. 임권택 감독은 정 감독 밑에서 영화를 배웠다.
정 감독에 대한 재평가가 최근 한국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영화학 교수들에 의해 그의 업적이 뒤늦게 재평가되면서 지난해 10월 부산영화제는 정창화 회고전을 가졌고 이어 홍콩에서도 회고전이 열렸다. 그리고 7월에는 파리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린다. 그래서 요즘 정 감독은 아주 기쁘다.
다소 답답한 일상을 바다낚시와 골프로 소일한다는 정 감독은 형편이 허락되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고아들에 관한 기록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한다. “요즘 한국 영화가 눈부신 발전을 했다”는 정 감독은 “세계시장을 노리고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라”고 후배들에게 당부했다.
정창화 감독은 영화가 자기 인생의 전부라고 말한다. 영화인이 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니 그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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