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LA 영화비평가협회 동료회원인 해리엣의 집에 가서 해리엣과 그녀의 남편 샘과 함께 스카치(싱글 몰트)를 마시며 영화 얘기를 하던 중 화제는 자연히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돌아갔다. 해리엣과 샘은 나와 달리 이 영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는데 내게 “너는 영화 어디에서 사랑과 관용을 찾아볼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예수가 자기를 학대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는 마음에서 그같은 것들을 느꼈다”고 대답했으나 해리엣과 샘은 내 말이 신통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개봉 2주만에 2억달러를 벌어들이면서 미국의 한 사회·문화현상으로 등장했다. 기독교 신자이냐 아니냐는 차원을 너머 그야말로 너도나도 보고 있다. 이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삼 예수와 기독교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계기가 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를 감독한 멜 깁슨은 예수의 산상설교보다 더 효과적인 전도를 했다고 해도 되겠다.
예수영화는 무성영화 시대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작되면서 예수역도 다양한 배우들이 맡아했다. 거의 모든 할리웃 예수영화들은 예수를 미끈한 체격에 푸른 눈의 미남으로 묘사해 왔는데 ‘그리스도의 수난’의 짐 캐비즐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은 진짜 예수는 영화 속 예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예수 시대 평균 남자의 신장은 5피트3인치, 평균 체중은 110파운드였다는 것. 그리고 예수는 금욕적인 생활을 한데다 사방팔방을 걸어다녀 매력과는 거리가 먼 근육이 툭툭 불거진 농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할리웃이 창조한 미남 예수의 전형적 경우가 ‘왕중 왕’(1961)의 제프리 헌터. 당시 사람들은 그를 ‘말리부 예수’라고 불렀었다. 스웨덴 배우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1965)에서 예수로 나온 막스 본 시도도 핸섬한 예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1988)에서 윌렘 다포는 자극적인 셀룰로이드 구세주로 나와 육감적인 바브라 허시와 정염을 불태웠 었다.
이밖에도 도널드 서덜랜드, 크리스 새란던 그리고 제레미 시스토(‘예수’-이 시리즈의 후반부가 CBS TV에 의해 28일 재방영 된다)와 로테르 블뤼토(‘몬트리올의 예수’) 및 차기 ‘배트맨’ 크리스천 베일(‘마리아, 예수의 어머니’)과 존 드루 배리모어 (‘본디오 빌라도’) 등도 모두 잘 생긴 예수들이다. 그런데 존 드루 배리모어는 ‘본디오 빌라도’(1962)에서 예수와 유다로 1인2역을 했었다.
많은 비평가들과 종교학자들이 최고의 스크린 예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엔리케 이라소퀴(사진)다. 이라소퀴는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영화 감독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가 만든 ‘마태복음’(Gospel According to St. Matthew·1966)에서 예수로 나왔는데 그는 배우가 아니라 경제학을 전공하는 스페인 대학생이었다. 이 흑백 영화는 마태복음에 적힌 그대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그린 엄격하며 표현력 풍부한 연기가 빛나는 최고의 예수영화이다.
영화에서의 예수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그 모습과 성격도 다르게 묘사되었다. 초기 영화인들은 그를 후광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아무 특색 없는 일요 성경학교판 예수로 표현했었다. 이것이 케네디 시대인 60년대 초에는 아서왕 스타일의 카리스마가 있는 예수(‘왕중 왕’)로 베트남전 발발 이전인 1965년에는 신비주의자의 모습(‘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얘기’)으로 70년대 초에는 평화주의자인 플라워 차일드(‘갓스펠’)로 그리고 20세기 후반에는 여러 편의 TV 미니시리즈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목수로 각기 모습을 달리했었다. 예수영화에 관한 책 ‘신성한 모습’을 쓴 로이 키나드와 팀 데이비스는 “그러나 푸른 눈에 백색의 길고 품이 큰 옷을 입은 유대 땅에서 온 보이스카웃이 지난 60여년간 할리웃에 의해 정형화한 예수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자료에 따르면 예수역을 맡았던 영화배우들 중 일부는 예수 노릇한 뒤로 스크린에서의 축복과는 달리 실제로는 배우생활이 조기 종결되는 저주를 받았다. ‘왕중 왕’의 제프리 헌터와 ‘본디오 빌라도’의 존 드루 배리모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수퍼스타’의 테드 닐리 등이 그런 배우들이다.
예수는 전 인류의 구세주여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대로 그를 묘사했다. 노예시대 흑인들은 검은 예수로, 유대인이었던 샤갈은 대학살의 피해자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은 금발로, 그리고 아시안들은 편도모양의 눈을 한 모습으로 각기 예수를 그렸다. 한국 사람들은 갓 쓰고 도포 입은 예수로도 표현했다. 그러나 진정한 예수의 모습은 영화나 그림같은 외적인 것에서보다 사랑하고 용서하는 마음에서 더 아름답게 나타날 것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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