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나이가 먹을 수록 과거에 매어 달린다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글이나 자매회사인 라디오 서울(AM 1650 일요일 상오 10시10분부터 ‘일요 시네마’) 방송에서 옛날 영화나 음악 얘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나이가 드니 뇌 조직이 이상해져서 어제 일은 생각이 안 나는데도 어릴 때 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옛날 얘기를 자주 하니까 독자나 청취자들도 거의 대부분 나와 나이 먹기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분들이다. 내게 전화로 물어오는 사항 중에 가장 많은 것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나온 영화들의 원어 제목. 그 중에서도 ‘마음의 행로’ ‘애수’ ‘무도회의 수첩’ 및 ‘인생유전’ 등이 질문의 단골대상 들이다.
지난해 말 타주에서 한 독자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나와 연배가 비슷하다는 이 분은 자신이 어릴 때 좋아했던 배우 오디 머피(Audie Murphy)의 얘기를 꺼냈다. 그의 많은 웨스턴 중 수작에 속하는 지미 스튜어트와 공연한 ‘밤길’(Night Passage·1957)을 아직도 기억한다면서 왜 머피에 관해서는 글을 쓰지 않느냐고 약간 책망하듯 물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분에게 내년 초에 꼭 머피에 관해 글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그 분은 우리 또래가 중고등학생 때 자주 다니던 경남극장, 우미관, 성남극장 등을 추억하면서 다작 출연이던 머피가 70년대 이후 활동을 중단한 이유와 그의 영화가 비디오로 많이 나오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나이 50줄에 든 사람들로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은 예쁘장하게 생긴 만년 소년얼굴에 미국사람 치곤 체구가 작은 머피를 기억할 것이다. 우선 독자 분의 질문부터 답을 하겠다. 머피가 70년대 이후 갑자기 활동을 중단한 것은 그가 1971년 사업차 경비행기 여행중 추락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이 47세였다. 그의 영화가 비디오로 많이 나와 있지 않은 까닭은 그의 생애 출연한 44편의 영화 중 좋은 영화가 적기 때문이다.
1924년 텍사스 킹스턴 부근서 가난한 목화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머피가 유명해지고 배우가 된 까닭은 전쟁서 세운 혁혁한 무공 탓이다. 머피는 2차대전 때 졸병으로 입대, 유럽전선에서 보여준 영웅적 행위로 소위로까지 진급했다. 그는 의회명예훈장 등 모두 24개의 훈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한 개인이 무공 때문에 받은 훈장으로서는 미 역사상 최다의 것으로 남아 있다.
머피의 이런 무공담은 자신이 직접 주연한 ‘지옥의 전선’(To Hell and Back·1955·비디오 출시)에서 재연되는데 이 영화는 전쟁 액션이 박진한 작품이다. 머피는 이와 같은 해에 웨스턴 ‘데스트리’에 주연했는데 이것은 지미 스튜어트와 마를렌 디트릭이 공연한 흥미진진한 ‘데스트리 다시 말 타다’(1939)의 리메이크. 나는 머피의 이 영화를 내 여동생과 함께 성남극장에서 봤는데 내 동생은 그때 머피의 예쁘장한 얼굴에 반해 그 뒤로 머피 팬이 되었었다.
머피는 1948년 앨란 래드가 주연한 드라마 ‘영광 너머’로 데뷔했는데 이 때부터 죽을 때까지 출연한 영화의 절대수가 싸구려 웨스턴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할리웃 영화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는데 그때 나는 닥치는대로 영화를 봐머피의 것도 많이 봤다.
머피는 말년에 스페인서 만든 엉터리 웨스턴으로 제목도 한심한 ‘텍시칸’이라는 영화에도 나왔지만 몇 편의 좋은 영화에도 나왔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존 휴스턴이 감독한 흑백영화 ‘용기의 붉은 배지’(The Red Badge of Courage·1951·사진·비디오 출시)일 것이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용기와 비겁의 의미를 탐구한 뛰어난 액션 드라마다.
웨스턴으로 좋은 것은 일종의 심리극인 ‘총알 위에 이름을 쓰지 마라’(1959·비디오 출시)와 머피가 탈영병으로 나와 인디언 습격에 직면한 텍사스 아낙네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쳐 주는 ‘페티코트 요새의 총’(1958). 또 버트 랭카스터와 오드리 헵번과 공연한 존 휴스턴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The Unforgiven·1960·비디 오출시)도 볼만하다.
그레엄 그린의 소설이 원작인 사이공을 무대로 한 정치 스릴러 ‘조용한 미국인’(1958)은 머피로서는 보기 드문 진지한 작품. 그러나 이 영화는 반미국적 내용을 말끔 히 제거해 원작의 뜻을 잃어버렸다. 이 영화는 2002년 마이클 케인과 브렌단 프레이저 공연으로 리메이크 됐었다. 머피의 유작은 제목이 마치 그의 죽음을 예고나 하듯 한 웨스턴 ‘죽을 때.’ 머피는 여기서 전설적 열차강도 제시 제임스로 나왔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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