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웨스트 LA에 있는 뉴아트 극장의 아침 시사회에 갔다가 이 극장의 젊은 매니저 짐과 영화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얘기를 하던 중 나의 시선이 극장 로비 벽에 붙여놓은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의 포스터 쪽으로 쏠렸다. 나는 짐에게 너 이 영화 봤니 하고 물었더니 그는 아직 못 봤다고 답했다. 나는 짐에게 이 영화 꼭 봐라. 이 영화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놓은 영화지라고 말했더니 짐은 아, 그러니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프레드 진네만이 1953년에 감독한 이 흑백 영화가 바로 나를 영화 미치광이로 만들어버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2차대전 직전 하와이 스코푸드 병영에 주둔한 군인과 그들의 여인 그리고 이들을 함께 휩쓸고 간 모진 운명에 관한 강렬한 드라마다. 중학교 2학년 때 서대문에 있던 동양극장에서 봤다. 고집불통의 프루윗 일병(몽고메리 클리프트)이 새디스트인 영창장 뚱보 젓슨(에네스트 보그나인)에게 매맞아 죽은 전우 마지오(프랭크 시나트라)를 위해 달밤 연병장에서 눈물을 흘리며 진혼나팔을 불때 울던 버릇이 지금도 남아 있다.
제임스 존스의 대하소설이 원작으로 고독의 영화요 군대라는 조직사회가 행사하는 압제에 저항하는 한 사나이의 투쟁의 영화다. 또 우정과 의리와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요즘 와서 이 영화를 진짜로는 거친 외형 속의 러브스토리라고 느끼게끔 됐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늘 매력적인 가슴 아픈 주제와 함께 프루윗의 동일화 강요에 대한 개성의 고수가 좋다. 군대를 가 본 많은 사람들은 이 조직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인간의 개인성 때문에 아픔을 당했을 줄 안다. 결국 프루윗은 황소고집을 부리며 이 개성을 찾으려다 희생당하고 만다. 프루윗의 그 고집이야말로 경하할 만한데 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부단히 움직이는 눈동자와 꿈꾸는 듯한 얼굴로 부리던 고집 때문에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뼈 속은 부드러우면서도 사나이다운 프루윗은 내가 군대 가서 고생할 때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었다.
프루윗은 이기지 못할 싸움인 체제에 대한 도전을 했지만 이 체제의 몰개성을 도사 같은 자세로 수용한 사람은 주임상사 워든(버트 랭카스터)이다. 프루윗과 워든은 모두 자기들의 애인보다 군대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군대가 그들의 애인인 셈인데. 나는 병영 막사에서 군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던 ‘재입대의 불루스’와 함께 프루윗과 위든의 말뚝 인생을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한다.
군인과 술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듯이 영화에서도 군인들은 고주망태가 되어 길 한가운데 주저앉아 주정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 기합 받고 술 마시고 여자를 그리워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군인들의 동일한 생태인 듯하다.
여자들보다 군대를 더 사랑하는 군인들의 사랑이란 어차피 작별로 끝나게 마련. 프루윗은 직업 파티 걸(소설에서는 창녀) 로린(도나 리드)을 사랑하고 워든은 자신의 중대장의 부인 캐런(데보라 카)을 사랑하지만 결국 여자들은 남자들을 잃고 만다. 도나 리드와 데보라 카는 이 영화에 나오기 전까지의 자신들의 이미지였다.
요조숙녀 스타일을 내팽개치고 파티 걸과 간부로 나와 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특히 자극적이었던 것은 빙산 같은 차가운 외모 속에 뜨거운 욕정을 지닌 짧은 머리의 데보라 카. 둘 다 수영복 차림의 데보라 카와 버트 랭카스터가 달밤 와이키키 해변에서 덮쳐드는 파도자락을 온 몸에 뒤집어쓰고 정열적인 키스를 나누는 러브신(사진)은 지금 다시 봐도 황홀 무아지경이다.
몬티(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세상의 고독은 혼자서 다 짊어지고 다니는 듯한 배우였는데 이 영화 외에도 ‘젊은 사자들’(The Young Lions)에서도 고집불통의 졸병으로 나와 죽도록 얻어터졌었다. 그런데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다소 믿어지지 않는 것은 빈약하다고 해도 될 체구의 몬티가 미들급 권투선수라는 점. 그는 부대의 권투선수가 되라는 중대장의 요구를 거절했다가 온갖 기합과 함께 외출도 못한다.
나는 지난 1987년 12월 이 영화에 관한 기사를 쓰기 위해 하와이를 찾아간 적이 있다. 스코필드 병영과 와이키키 해변을 돌아보면서 깊은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오스카 작품 및 감독상등 일부 8개 부문 수상작인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개봉 50주년을 맞아 새 프린트로 오는 11일까지 뉴아트(310-281-8223)서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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