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막을 내린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의 신작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Nicholas and Alexandra·사진)가 비평가들의 혹평 속에 사후 부검까지 받는 수모를 당했다. 볼셰비키 혁명군에 의해 총살당한 러시아의 마지막 황체 로마노프가의 니콜라스 2세와 그의 가족의 마지막 삶을 그린 이 작품은 로스앤젤레스 오페라가 작곡을 의뢰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LA 공연이 세계 최초 공연이라는 점에서 전미비평가들의 이구동성 혹평은 작품 자체뿐 아니라 플라시도 도밍고를 감독으로 그리고 켄트 나가노를 상임지휘자로 영입한 뒤 힘찬 도약을 꿈꾸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오페라에게도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로마노프가의 마지막 지배자의 비극적 운명처럼 오페라적인 드라마도 없을 것이다. 황제 되기를 원치 않았던 유약한 니콜라스와 외국 태생의 의지가 강한 황후 알렉산드라 그리고 혈우병을 앓는 어린 외아들 알렉시스와 황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괴승 라스퓨틴. 이들의 사랑과 갈등과 처참한 죽음이 러시아 혁명 직전의 격동하는 사회 및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사연을 이루고 있다.
나도 큰 기대를 안고 지난달 17일 두번째 공연을 관람했다. 뛰어난 가수들인 도밍고와 바리톤 로드니 길프리(니콜라스역)와 소프라노 낸시 거스탑슨(알렉산드라역) 그리고 러시아가 낳은 세계적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인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세계 초연인 만큼 장내에서 새 것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의 흥분감 같은 것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공연시간 2시간반짜리 오페라를 관람하면서 이제나저제나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뭔가 일어나는 것이 없었다. 러시안 챈트에 사랑의 듀엣도 있으나 멜로디나 리듬이 지극히 열등하고 무미했다. 세트도 단조롭고 극적 화려함이나 강렬성도 전무하다시피 했다. 한마디로 말해 음악성이 결여된 오페라였는데 오페라를 보면서 언뜻 떠오르는 것이 한국 오페라 ‘명성황후’였다.
LA타임스, 뉴욕타임스 및 월스트릿 저널 등 미 굴지의 신문들로부터 혹독한 비평을 들은 이 오페라로 지금 크게 상심하고 있을 사람이 도밍고일 것이다. 신인이다시피 한 작곡가 데보라 드라텔은 당초 니콜라스역으로 도밍고를 생각하고 음악을 작곡했었다. 그런데 도밍고가 진행중인 작품을 들은 뒤 드라텔에게 자신은 라스퓨틴역을 노래하고 싶다는 바람에 당초 테너가 노래할 황제역이 바리톤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도밍고가 황제보다 괴승역을 맡겠다고 나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이다. 라스퓨틴은 치명적 질병을 앓는 알렉시스의 고통을 덜어주는 바람에(최면술을 썼다는 설이 있다)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받아 황실과 국가마저 지배하려 들다 젊은 장교들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그가 알렉산드라의 정부라는 설까지 나돌았었는데 라스퓨틴은 고려 말 공민왕 때 국정을 떡 주무르듯 하다가 처형당한 승려 신돈의 러시아판 같다.
그런데 라스퓨틴 얘기보다 더 흥미 있는 것이 니콜라스의 네 딸중 하나인 아나스타시아의 생존설. 아나스타시아는 혁명군의 총살에서 살아남아 외국으로 피신했다는 설이 끊임없이 나돌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자신이 아나스타시아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있어 세상은 그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을 일삼았었다.
아나스타시아의 얘기를 아름답게 그린 영화가 ‘추상’(Anastasia·1956)이다. 이 영화로 오스카 주연상을 받은 잉그릿 버그만의 명연기와 아나스타시아,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 보세요로 시작되는 알프렛 뉴만의 감상적이요 달콤한 주제가로 유명한 추억의 명화이다. 영화에는 율 브린너가 추방된 러시아 장군으로 나온다.
LA타임스는 이 오페라의 부검기사에서 실패의 이유로 ▲신인 작곡가를 너무 믿은 점 ▲한번도 오페라 대본을 써본 적이 없는 정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본 하트만에게 글을 맡긴 점 ▲도밍고가 가수로서 자기 역에 너무 매달려 작품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 등을 들었다.
음악계에서는 ‘니콜라스와 알렉산드라’에 대한 가혹한 반응(그러나 전 5회 공연 매진)이 미국 오페라와 전체적 움직임에 줄 타격이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신곡을 한번 듣고 그 진가를 평가한다는 일이 과연 어느 정도 타당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 그래도 나는 이 오페라를 믿는다는 도밍고의 신념과 추진력의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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