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여자를 처음 보고 반할 때 사로 잡히게 되는 매력 포인트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눈과 코, 귀와 입, 목과 손등이 모두 사람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도둑이 될 수 있다.
베니스를 무대로 펼쳐지는 못 이룰 사랑의 영화 ‘여정’에서 이탈리안 유부남 로사노 브라지는 미국서 관광 온 노처녀 선생 캐서린 헵번의 샌들을 신은 발뒤꿈치를 보고 반한다. 대학시절 나와 절친했던 한 친구는 여자의 종아리를 보면 야릇한 관능미를 느끼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여자의 다리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2차대전 때 핀-업 걸이었던 수영복을 입은 베티 그레이블의 다리일 것이다. 그리고 몹시 선정적이었던 발가락은 영화 ‘롤리타’에서 아버지뻘인 대학 교수 험버트(제임스 메이슨)가 페디큐어를 해 주던 조숙한 틴에이저 애인 롤리타(수 라이언)의 도톰한 열 발가락.
로마의 기차역에서 일어나는 이별의 로맨스 영화 ‘종착역’(Terminal Station·1952·흑백)에서 이탈리안 총각 조바니(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스패니시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미국인 유부녀 메리(제니퍼 존스)의 다리를 보고 그녀에게 반한다. 조바니는 역구내 식당서 메리에게 “나는 당신의 다리를 보고 좋아했어”라고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고백한다.
기차역과 이루지 못할 사랑이라는 점에서 데이빗 린 감독의 ‘짧은 만남’을 연상케 하는 ‘종착역’을 오랜만에 다시 보니 그 간절하고 슬픈 사랑에 심장의 혈관이 터져 나갈 듯이 아프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느 겨울 날 수도극장에서였다. 내가 그만큼 어른이 되어서일까. 그 때보다 지금의 느낌이 더욱 강렬하다.
이 영화는 겨울 로마의 종착역에서 하오 7시부터 8시30분까지 일어나는 두 연인의 이별 이야기다. 피사에서 대학 교수직을 맡게 될 조바니와 필라델피아에서 자매를 만나러 온 나이 먹은 남편과 일곱살짜리 딸을 둔 메리(조바니는 마리아라고 부른다)가 사랑과 이별 때문에 울고 부는 바람에 보는 사람도 눈시울을 적시게 된다.
둘 다 모두 아름답게 생긴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제니퍼 존스의 잠깐의 희열 뒤 찾아든 고뇌와 회한이 통절하다. 특히 조바니가 소년처럼 징징대며 메리에게 애걸하고 투정하고 매달리면서 “나하고 살자”고 조르는 모습이 측은하기 짝이 없다. 조바니는 격분을 못 이겨 메리의 뺨까지 때리지만 어차피 맺지 못할 사랑.
세상 고독을 혼자 다 짊어지고 다니는 듯한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소매가 약간 긴 코트를 깃을 올려 입고 역구내를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연인을 찾아 헤맨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다소 후줄근한 코트가 이별을 코앞에 둔 남자의 속수무책과 공허를 엉성하니 감싸안아 을시년 시럽기까지 하다.
마치 ‘하이눈’에서 처럼 카메라가 기차의 출발시간을 향해 다가가는 시계바늘을 클로스업, 몸살나게 초조해 진다. 마지막까지 가는 님을 말려보려고 메리를 따라 기차에 오른 조바니. 기차 떠나기 시작하자 조바니는 플랫홈으로 뛰어 내리다 비명을 지르며 대자로 넘어 진다.
비정하니 기적을 울리며 역 구내를 빠져나가는 파리행 기차를 거의 동경의 눈으로 배웅하고 나서 손에 든 코트자락을 바닥에 질질 끌며 힘없이 걸어가는 조바니의 등과 옆모습에 흐르는 고독이 청승맞다.
‘종착역’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데이빗 O. 셀즈닉(당시 제니퍼 존스의 남편)이 네오리얼리즘의 대가인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데 시카에게 의뢰해 만든 영화다. 만들 때부터 제작자와 감독간에 불화가 심했는데 데 시카가 완성한 89분짜리를 셀즈닉은 64분짜리로 토막낸 뒤 ‘미국 부인의 무분별’(Indiscretion of an American Wife)이라는 야한 제목으로 미국에서 개봉했었다.
데 시카의 네오리얼리즘 특색을 닥치는 대로 잘라버린 미국판은 너무 짧아 본 영화 시작 전 패티 페이지가 ‘로마의 가을’과 ‘무분별’을 노래하는 단편을 상영했었다.
그런데 유부녀인 존스는 영화를 찍던 중 실제로 클리프트에게 반했는데 클리프트가 게이여서 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화가 난 존스는 자신의 밍크 재킷을 화장실 변기 속에 쑤셔 넣었다고 한다.
걸작 클래식과 외국 영화들을 DVD로 내놓는 Home Vision Entertainment가 ‘미국 부인의 무분별’과 ‘종착역’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한 디스크로 출반했다. (사진) 절대적 힘을 행사하는 이별을 막아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두 연인의 클로스업된 얼굴과 함께 유럽과 미국의 영화예술 감각을 대조해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디스크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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