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를 연주할 때 유난히 무대매너가 화려한 사람들이 있다. 장발을 휘날리며 귀부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리스트는 뛰어난 기교의 피아니스트였는데 연주 제스처가 현란하기 짝이 없어 시쳇말로 그루피까지 있었다. 얼마 전 뉴욕서 연주하다 음악에 도취돼 스커트 자락을 밟아 넘어졌던 바이얼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토라체도 무대 매너가 화려한 연주가들이다. 나는 수년 전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토라체가 LA 필과 협연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들은 적이 있다. 육중한 체구의 토라체는 두 다리를 쫙 벌리고 앉아 마치 나무꾼이 도끼로 장작을 패듯 건반을 두들겨댔다. 음악도 거인급이지만 그의 태풍 치는 듯한 연주 스타일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연주가들 중 무대매너가 가장 화려하고 변화무쌍하다 못해 야단스럽기까지 한 사람은 중국인 청년 피아니스트 랑 랑(21)이다. 상고머리에 중국인 특유의 호떡모양의 동그랗고 앳된 얼굴을 한 랑 랑은 마치 피아니스트역을 맡은 배우가 때로 오버 액팅을 하는 것처럼 제스처가 요란해 음악을 충분히 감상하는데 다소 방해가 될 정도다.
나는 그가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는 것을 각기 따로 감상한 바 있다. 차이코프스키를 연주하는 랑 랑은 마치 레이 찰스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처럼 온몸을 들었다 놨다 하다가 두 팔을 앞으로 뒤로 내저으면서 건반이 깨져라 쳐댔다. 로맨틱한 악기인 피아노로 감정이 넘쳐흐르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연주하는 그 정열적 제스처에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는데 LA타임스는 이튿날 속된 연주였다고 비판을 했다.
밴 클라이번이 1958년 모스크바서 열린 국제 차이코프스키 경연대회서 연주, 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우승을 해 더 유명해진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내가 제일 먼저 들은 클래식컬 뮤직이어서 지금도 유난히 애착하는 곡이다. 특히 혼의 극적인 부름에 이어 천둥치는 듯한 피아노의 음을 타고 흐르는 윤기 나는 현의 멜로디로 시작되는 제1악장의 주제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감정적이다. 차이코프스키 특유의 감상적 멜로디를 지닌 이 주제는 델라 리스가 ‘투나잇 위 러브’라는 제목의 팝송으로 편곡해 부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은 가장 인기 있는 피아노협주곡 중 하나가 된 이 곡이 처음에는 천박한 음악이라는 말을 들었다. 차이코프스키는 1874년 이 곡을 지은 뒤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니콜라이 루빈스타인이 쳐주기를 원했는데 루빈스타인은 차이코프스키의 연주를 듣고 나서 연주 불가능하고 저속한 음악이라며 완전히 개작하라고 건의했었다. 그런데 루빈스타인은 3년 후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이 곡을 연주했다. 이 에피소드는 러시아 영화 ‘차이코프스키’의 맨 첫 장면에서도 묘사된다.
랑 랑이 이 곡을 처음 들은 것은 고향인 센양에서 두 살 때였다고 한다. 그때 이미 이 음악의 감정에 사로 잡혔고 그 뒤로 이 곡의 연주가 그의 평생의 꿈이 되었다. 랑 랑이 이 곡을 최초로 연주한 것은 13세 때 베이징에서 중국 청소년교향악단과의 협연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랑 랑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이 선풍적인 센세이센을 일으켰던 것은 랑 랑이 17세 때인 1999년 시카코에서였다. 그해 10월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순간에 병이 난 안드레 와츠를 대신해 무대에 오른 랑 랑과 시카고 심포니와의 협연은 1만3,000명의 청중을 열광케 했고 이 연주를 계기로 랑 랑은 국제적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만큼 랑 랑과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 그리고 시카고 심포니는 불가분의 관계라 하겠다. 랑 랑이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와 협연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제1번을 자신의 데뷔 CD(사진)로 내놓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도이체 그라모폰 (Deutsche Grammophon)이 출반한 CD에는 멘델스존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도 수록됐는데 격정적인 것과 섬세한 것이 대조를 이루며 잘 어울리는 음반이다. 랑 랑은 음반 출반과 함께 가진 인터뷰에서 “이 두 곡은 매우 연주하기 힘들지만 잘 치면 인간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곡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음악은 마법적 일’이라는 것을 잘 들려주는 CD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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