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세상을 떠난 할리웃의 큰 별 캐서린 헵번은 시대를 앞서 간 신여성이었다. 브로드웨이를 거쳐 할리웃에 진출해 불과 세번째 영화인 ‘나팔꽃’(1933)으로 첫 오스카 주연상을 받았지만 다른 스타들과 달리 파티와 인터뷰와 팬 사인 같은 것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또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패션스타일인 바지에 셔츠를 입고 단화를 신고 다녔던 독불장군이었다.
헵번이 이토록 도도할수 있었던 것은 미동부 명문부자집의 진보적 성향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명문 사립대를 나온 배경이 상당한 작용을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그녀는 언제든지 할리웃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헵번은 오만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했고 지적이었으며 또 직설적이어서 스타가 되기도 전부터 툭하면 제작자와 감독들과 싸우는 일이 잦았다. 얼굴의 광대뼈만큼이나 콧대가 높은 여자였다.
지와 미를 겸비한 여자로 70년이 넘게 연기 생활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본연의 자세를 조금도 흐뜨리지 않았던 헵번이어서 매스컴은 그녀의 타계를 마치 한 여신의 퇴장처럼 다루고 있다. 헵번은 연기 잘하고 (그러나 한때 박스 오피스의 독이라 불리기도 했다) 줏대 세고 똑똑한 할리웃의 군계일학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내게 있어 그녀는 따뜻한 체온을 지닌 인간이라기 보다 차가운 대리석상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온통 각이 진 얼굴에 튀어 나온 광대뼈와 쇠 긁는 소리 같은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에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인상이다. 감정적이라던지 또는 로맨틱 하다던지 하는 말이 전연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안팎이 모두 나 같은 보통남자들이 좋아하기에는 편치가 않은 여자다.
그런 헵번이 역시 자기처럼 전연 로맨틱한형이 아닌(적어도 내가 보기엔) 모범아저씨 같은 유부남 스펜서 트레이시와 25년간 변치 않는 사랑을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랑의 불가사의를 새삼 깨닫게 된다. 헵번은 캐서린 헵번이라기보다 ‘트레이시와 헵번’(사진)이라 불러야 어울릴만큼 둘의 사랑은 전설적인 것이었다. 둘은 첫공연작 ‘올해의 여성’(1949)에서 처음 만나 트레이시의 유작으로 역시 헵번이 나온 ‘초대 받지 않은 손님’(1967)에 이르기까지 4반세기를 사랑했다. 트레이시가 독실한 가톨릭신자여서 이혼을 안 해 좋은 가십거리였지만 미디어는 둘을 존중해 그들의 사랑을 외면했다. 그런데 한 번 이혼경력이 있는 헵번은 한때 하워드 휴즈의 애인이었다.
헵번은 심장병이 악화된 트레이시를 돌보느라 1962년부터 5년간 연기생활마저 쉬었고 트레이시가 죽기 직전에는 그의 부인을 대신해 밤새 연인의 병상곁을 떠나지 않았다. 태미 위넷의 노래처럼 굳세게 님의 곁을 지킨 여자였다. 어떻게 보면 트레이시와 헵번의 사랑은 갑자가 뜨겁게 불 붙었다 금새 식는 정열적 사랑이라기 보다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이성적 사랑이어서 그렇게 오래 계속됐는지도 모른다.
헵번은 자기 회고록 ‘사랑’에서 트레이시와의 관계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펜서가 나에 관해 어떻게 느꼈는지를 전연 알지 못한다. 그가 날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내 곁에 남아있지 않았었으리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그는 우리 서로의 감정에 대해 말 하려 하지 않았고 나도 말 하지 않았다. 우리는 절대적 희열 속에서 27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일컫는다.”둘은 영혼의 반려자임에 분명한데 이제 마침내 내내 함께 있게 됐다.
헵번의 팬이 아니었던 내가 매우 좋아하는 그녀의 영화가 ‘여정’(Summertime·1955)이다. 미국 노처녀와 이탈리안 유부남과의 베니스에서의 맺지 못할 사랑을 그린 데이빗 린 감독의 로맨틱하고 아름다우며 가슴 아픈 이야기다. 오하이오에서 베니스로 혼자 관광 온 촌닭 같은 노처녀선생 제인(헵번)은 이곳서 골동품상을 경영하는 잘 생긴 유부남 레나토(로사노 브라지)를 만나 며칠 간의 희열에 찬 짧은 사랑을 나누고 헤어진다. 그림엽서 처럼 고운 촬영과 낭만적이면서도 서러운 음악 그리고 헵번의 섬세한 연기가 황홀무아지경인데 특히 기차를 타고 떠나는 제인을 마지막으로 보려고 손에 하얀 가데니아를 들고 뒤 늦게 역내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는 레나토의 라스트 신은 지금도 나의 가슴에 깊이 각인 되어있다.
헵번을 생각할때 한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그녀의 마지막 영화 ‘러브 어페어’(1994)다. 워렌 베이티와 그의 부인 아넷 베닝과 함께 나온 이 영화는 케리 그랜트와 데보라 카가 주연한 ‘잊지 못할 사랑’(1957)의 리메이크인데 볼품도 없었고 흥행서도 실패했다. 그런데 왜 둘을 ‘헵번과 트레이시’라고 안불렀을까.
박흥진<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