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볼 때마다 우는 영화가 몇 편 있다. 안개 낀 카사블랑카 공항에서 릭과 일사가 이별할 때(‘카사블랑카’) 울고,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매맞아 죽은 프랭크 시나트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달밤 연병장에서 나팔을 불 때 운다. 그리고 모두 기혼자인 중년의 트레버 하워드와 실리아 존슨이 이루지 못할 사랑을 기차역에서 청산할 때(‘짧은 만남’) 울고, 셰인과 그를 영웅시하는 어린 조이가 헤어질 때(‘셰인’) 운다.
아니 무슨 서부영화를 보면서 우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그랜드 티튼 산등성이를 넘어 말을 타고 떠나가는 셰인을 향해 조이가 “셰인 컴 백” 하고 소리치면 메아리가 “셰인 컴 백”하고 받아 호소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울고 만다. 중학교 1학년 때 이 장면을 보면서 울었던 것이 버릇이 되었나 보다. ‘셰인’은 그만큼 감정적인 영화다.
지난 4일은 ‘셰인’(Shane)이 할리웃의 차이니스 극장에서 개봉된 지 꼭 반세기가 되는 날이다. 지금은 고전 걸작 웨스턴이 된 ‘셰인’을 만들 때만 해도 제작사인 패라마운트는 이 영화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한다. 잭 쉐이퍼가 쓴 평범한 소설이 바탕인데다 흥행성이 없는 앨란 래드(그의 영화는 260만달러의 수입이 고작이었다)가 주연했기 때문. 그래서 패라마운트는 제작비만 건지는 조건으로 이 영화를 하워드 휴즈의 RKO사에 팔아 넘기려고까지 했다.
이런 희망 없는 영화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어놓은 사람은 감독 조지 스티븐스(‘젊은이의 양지’ ‘자이안트’)다. 그는 의상과 도구 등 모든 것을 철저히 고증해 만들었고 또 ‘연기라곤 전혀 할 줄 모르는 배우’로 알려진 래드로부터 우수가 가득하면서도 확신에 찬 명연기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빅터 영의 감미롭고도 쓸쓸한 음악과 오스카상을 받은 촬영도 매우 아름답다. 제작비 290만달러짜리 영화는 700만달러의 흥행수입을 내며 빅 히트했다. 그런데 스티븐스는 당초 셰인역으로 ‘젊은이의 양지’에서 함께 일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선택했었다.
셰인은 서부시대가 저물어 가던 때 새 사회질서가 더 이상 킬러에게 머무를 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 시대의 퇴적물이다. 그런 자가 총을 놓기로 결정하나 결국 건맨의 운명이라는 팔자소관 탓에 다시 총을 뽑아들게 된다. 스티븐스는 이 영화에서 총기 숭배사상을 깎아 내리고 있다. 2차 대전에 종군, 기록영화를 만들면서 총기의 횡포를 목격한 그는 총이란 파괴적이요 폭력적인 도구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셰인과 조이(브랜든 디 와일드·사진)의 이별장면 만큼이나 애틋한 것이 셰인과 조이의 엄마 매리온(진 아서)의 표현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다. 알듯 모를 듯한 두 사람의 애정이 신비로울 지경이다. 셰인이 자기가 신세를 진 농가의 주인 조(밴 헤플린)를 대신해 고용된 킬러 윌슨(잭 팰랜스)을 처치하러 떠나려 하자 매리온은 “나를 위해서 하시는 것이지요. 영원히 돌아오시지 않으시겠지요”라며 울먹인다. 셰인은 “영원은 긴 시간이지요”라는 말을 남긴 채 떠난다.
와이오밍의 위풍당당한 그랜드 티튼이 내려다보는 잭슨 호울이 무대인 ‘셰인’은 내용은 간단하지만 전설적 분위기와 신비감이 가득하다. 스티븐스(그의 유일한 웨스턴이다)도 이 영화를 ‘아서왕 전통 스타일의 미국 얘기’로 만들려고 했다. 특히 영화 내내 화면에 상존하는 그랜드 티튼의 기운이 작품의 모태 노릇을 하고 있다.
나는 15년 전 영화 ‘셰인’에 관한 글을 쓰기 위해 아들과 함께 잭슨 호울을 찾아간 적이 있다. 산은 잭슨 호울 계곡을 회색의 영혼처럼 불길하게 짓누르고 서서 소리를 내며 살아있는 듯 했다. 검은 잿빛을 한 바위산은 신비하고 격하며 어둡고 운명적이며 또 초연했다. 그런 모양과 성질이 셰인의 그것과 같았다.고독한 영웅을 받아주는 것은 산밖에 없다.
‘셰인’은 세상의 슬프고 폭력적인 것들을 피곤하게 짊어진 서부의 마지막 살인자의 짧은 체류를 순수한 어린 조이의 둥그렇게 뜬 큰 눈을 통해 바라보고 있다. 조이는 이 총잡이와의 인연을 통해 마침내 유년기를 벗어나나 그것은 자기가 숭배하는 영웅과의 이별이라는 가슴 아픈 대가를 치루고 나서였다.
그런데 다 죽어가던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부활시킨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85년 ‘셰인’을 경배하는 뜻으로 이와 내용이 똑같지만 폭력적인 웨스턴 ‘창백한 기수’를 감독하고 주연도 한 바 있다. 한 때 반짝하던 웨스턴은 이제 다시 퇴물이 됐지만 ‘셰인’은 시간을 초월한 고전으로 늘 남아 있다. 아마 오늘 저녁에 또 봐도 또 울 것이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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