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LA타임스 1면에 이라크전에 파견된 미군들이 방탄복을 입은 채 티그리스강 인근 노상에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크게 실렸다. 십자가와 포도주 잔이 놓인 임시제단 앞에서 군목이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뒤로 손에 성경을 든 군인들이 머리를 숙여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 곳에서 태어났다는 아브라함이 신의 지시에 따라 늦게 본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전 기도하는 모습과 함께 아고스의 왕 아가멤논이 트로이를 치러 가기 전 순풍의 대가로 자기 딸 이피게니아를 제물로 바치는 모습을 연상했다.
전쟁과 종교는 결코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현상이지만 옛날부터 인류의 전쟁은 모두 종교전쟁이라 불러도 될 만큼 종교의 이름 아래 많은 전쟁이 치러졌다. 십자군 전쟁이 그 대표적 예이고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은 복음전파라는 미명 하에 무자비한 식민전쟁을 자행했다. 마호메트는 ‘한 손에 칼을 또 다른 손에는 코란을’ 들고 전쟁을 했는데 회교도들은 자신들의 전쟁을 성전이라 부르며 싸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대결도 영토분쟁이라기보다 종교전쟁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 또한 종교전쟁이라고 봐도 될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되자 주먹을 불끈 쥐고 “야, 기분 좋다”라고 좋아한 부시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 각료들과의 아침 회의를 하기 전 기도부터 한다는 부시는 이번 전쟁을 세상에서 악을 제거한다는 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십자군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믿음이 일방 통행할 때 세상에는 분란이 있을 뿐 이다.
과연 신들이 이번 전쟁을 독려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신들은 신화시절부터 인간들의 싸움에 개입하길 즐겨했다. 수퍼파워를 지닌 인간이나 다름없는 신들이 인간 전쟁에 서로 편을 갈라 개입하면서 불난리를 친 것이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호머의 시 ‘일리아드’는 트로이 전쟁 얘기인데 이 전쟁은 여자 때문에 일어났다. 인간과 여신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분쟁의 여신 에리스가 느닷없이 식장에 나타나 내 던진 것이 ‘가장 예쁜 여자의 것’이라고 적힌 황금사과. 세 여신 헤라와 아테나와 아프로다이테는 사과가 서로 자기 것이라고 다투다 트로이(현재의 터키)의 왕자 패리스에게 심판을 부탁한다. 패리스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주겠다는 아프로다이테의 손을 들어 주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절세 미녀는 스파르타의 왕비인 헬렌.
총각 패리스가 유부녀 헬렌과 눈이 맞아 둘이 함께 트로이로 도주하자 헬라스(그리스) 제국의 왕들이 1,000척의 선박에 동맹군을 싣고 트로이를 공격한 이 전쟁은 장장 10년간 계속됐다. ‘트로이의 헬렌’이라 불린 헬렌이야말로 경국지색으로 이 여자 때문에 트로이는 멸망하고 교전 양측에서 무수한 인명이 희생된다. 이때 전투는 삼국지식 전투였는데 패리스와 그의 형인 용장 헥터는 전사하고 나머지 왕족은 연합군에 의해 모두 멸살됐다.
연합군측의 가장 큰 피해는 아킬레스의 전사. 발뒤꿈치(아킬레스의 건)를 빼고는 온몸에 칼이나 화살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불사신이나 다름없는 아킬레스는 패리스가 쏜 화살에 발뒤꿈치를 맞고 사망한다. 아폴로 신이 패리스 편을 들어준 결과였다.
전쟁이 벌어지면서 신들은 서로 편을 갈라 연합군측과 트로이측을 응원했다. 패리스에 감정이 있는 헤라와 아테나는 연합군측을, 아프로다이테와 아폴로는 트로이측을 응원했고 제우스는 트로이 편이나 중립을 지켰으며 분란의 씨인 황금사과를 내던진 에리스는 전쟁을 좋아해 양측을 모두 응원했다고 한다.
이 전쟁은 연합군측을 응원하던 신이 피곤해 휴식을 취하면 트로이측이 승전하는 식으로 신들이 서로 힘 자랑하는 일종의 신들의 전쟁이었다. 꾀보 오디세우스(율리시즈)의 아이디어로 만든 목마 때문에 트로이가 멸망한 뒤 헬렌은 스파르타로 돌아가(귀국하는데 7년이나 걸렸다) 왕비로서 내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죽은 사람들만 억울하게 됐다.
트로이 전쟁을 내용으로 한 영화로 ‘트로이의 헬렌’(Helen of Troy·1956·사진)이 있다. 이탈리아 배우 로사나 포테스타가 헬렌으로 나왔는데 외화내빈이나 즐긴 만하다. 그리고 현재 브래드 핏 주연으로 이 얘기가 다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비참함만 불러올 뿐이다. 신들이 나서서 말려줬으면 좋겠다.
박흥진<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