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3일 보우타이와 턱시도를 빌려 입고 취재한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쇼와 전쟁이라는 얄궂은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다.
먼저 엄청나게 삼엄한 경비에서 전쟁의 기운이 느껴졌다. 식이 열린 할리웃의 코닥극장 상공에는 헬기들이 날고 있었고 방탄조끼에 중무장한 경찰들이 극장 밖과 주변 건물 옥상 위에 배치됐는가 하면 기자들을 실어 나르는 셔틀버스의 종점에서 극장으로 이르는 길은 버스로 차단됐다.
인터뷰실이 있는 극장 옆 르네상스호텔 입구에서는 검은 색의 정장한 보안요원들이 기자들의 출입증을 일일이 검사했고, 금속 탐지기 시설을 통과하고 기자실로 가는 복도에도 보안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기자실 내도 마찬가지. 기자실 밖 복도에 차려진 간단한 먹을거리들을 접시에 담아 먹는 동안에도 보안요원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는 바람에 밥맛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기자보다 보안요원이 더 많다는 착각이 들 정도. 대통령 취재하기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이같은 삼엄한 경비가 쇼의 화려한 분위기를 뒤에서 조명해 주면서 야릇한 스릴감마저 느끼게 했다. 남의 집 불구경하며 느끼는 짜릿한 쾌감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전쟁의 기운 때문에 이번 오스카 쇼는 예년에 비해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그렇다고 그런 기운이 이 ‘지상 최대의 쇼’의 번쩍거리고 흥분스런 기분을 말끔히 쓸어낼 수는 없었다. 내 옆에 앉은 기모노 차림의 마이니치 신문기자와 맞은 편에서 열심히 사전을 들춰보는 폴란드 기자를 비롯해 260명의 기자들이 들어찬 인터뷰실과 식장 내외는 시상식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잔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들뜬 열기로 가득 찼다.
쇼와 전쟁이라는 초현실적 분위기는 기자들의 시상식 모니터용으로 인터뷰 실에 설치된 여러 대의 TV에서 스팟 뉴스로 이라크 전쟁 상황이 방송될 때 거의 으스스한 기분마저 자아냈다. ABC-TV의 피터 제닝스가 “오늘 아군의 사망자가 수십명에 이릅니다”라고 말한 뒤 “그럼 다시 아카데미 시상식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라진 뒤 계속되는 쇼를 보는 느낌이야말로 이 세상의 것 같지가 않았다. 기자실 밖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도 계속 이라크 전쟁 실황이 보도돼(사진) 전쟁통에 쇼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쇼 바람 속에 전쟁을 치르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기자들은 생태적으로 진보주의자들이게 마련(월스트릿 저널 기자들은 말고). 이같은 기자근성이 왁자지껄하게 드러난 것이 마이클 모어가 미국인들의 총기애호를 야유하고 비판한 ‘컬럼바인에서의 볼링’으로 기록 영화상을 받았을 때. 그의 이름이 발표되는 순간 기자실은 환호와 박수소리로 떠들썩.
모어는 이날 기자들의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아 그가 인터뷰실에 들어서자 다시 한번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이어 쏟아져 나온 질문들도 모두 그의 반전 수상소감과 관련한 것들.
그는 수상소감에서 “부시씨 부끄러운 줄 아시오. 당신의 때는 끝이 났소”라고 말해 참석자들의 환호와 야유를 함께 받았는데 기자실에서도 흥분된 목소리로 부시와 그의 석유재벌 친구들을 마구 공격했다. 이날 그의 인터뷰 시간은 다른 수상자들보다 훨씬 길어 마치 모어의 잔칫날 같은 기분.
전쟁 때문에 기자들의 질문도 그에 관한 것들이 많았다 . 이날 명예상을 받은 피터 오툴(70)은 기자들의 쇼와 전쟁에 관한 질문에 대해 “쇼는 진행돼야 한다”면서 “나는 연예인이다. 그것이 내 직업이다. 내 직업은 할 수만 있다면 군인들과 도처에 있는 사람들의 기운을 북돋워주는 것”이라고 대답,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날 시상식에는 메릴 스트립, 에이드리안 브로디(‘피아니스트’로 주연상 수상), 팀 로빈스, 로브 마샬(작품상 수상 ‘시카고’의 감독) 및 페드로 알모도바르(‘그녀에게 말해’로 각본상 수상) 등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핀을 달고 참석했다. 반면 텍사스 출신의 젊은 배우 매튜 매코너헤이는 적·백·청색의 꽃단추를 달고 나와 주위의 눈길을 끌었다.
전쟁통에 무슨 오스카 쇼냐고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9.11테러가 났을 때 토론토 영화제 주최측은 영화제 중단문제를 논의했었다. 이때 참석한 프랑스의 명배우 잔느 모로는 이렇게 말했었다. “왜 우리가 살기를 멈춰야 하는가.” 그렇다 쇼는 진행돼야 한다(The Show Must Go On).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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