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에 ABC-TV가 방영해 빅 히트한 미니시리즈 ‘전쟁의 바람’은 2차대전의 광풍이 세계와 국가 지도자들 및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을 바꿔놓은 얘기를 도도한 대하처럼 그린 드라마였다.
전쟁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이 바람의 큰 피해 대상 중 하나가 오스카이다. 프랭크 피어슨 아카데미 위원장은 19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23일 거행되는 제7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붉은 카펫을 밟는 스타들의 입장 없이 열릴 것이라고 밝혔다.
‘지상 최대의 쇼’인 아카데미 시상식의 가장 화려한 부분이 스타들의 시상식 입장 모습이다. 호사스런 보석과 의상으로 치장한 스타들이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미디어와 인터뷰를 하고 붉은 카펫을 밟으며 식장으로 입장하는 모습이야말로 오스카 쇼의 불꽃놀이와도 같다.
아카데미는 이런 화려의 극치가 전쟁의 분위기에서는 경솔로 여겨져 카펫을 걷어버렸는데 피어슨은 “시상식의 모든 것은 전쟁의 바람에 달려 있다”며 최후 순간에 시상식이 연기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스타들의 공개입장 없는 오스카 시상식은 75년 역사상 이번이 처음.
나는 시상식을 취재하기 위해 두개의 신분증을 발급 받았다. 하나는 스타들의 입장 취재용이고 다른 것은 수상자들과의 인터뷰용인데 먼저 것은 이제 쓸모가 없게 됐다. 나는 전쟁의 바람 속에 오스카 쇼 준비과정이 궁금해 19일 오후 시상식이 열릴 할리웃의 코닥 극장을 찾아갔다. 기자들과 팬들을 위한 야외석은 아직 치워지지 않은 채 인부들이 극장으로 연결된 통로에 붉은 카펫을 깔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시상식이 열릴 모양이구나.
전쟁의 바람 때문에 오스카 시상식 불참을 통보한 사람들도 있다. 시상자들인 배우 윌 스미스와 케이트 블란쳇 그리고 ‘반지의 제왕’ 속편으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피터 잭슨 등. 이들은 개인적 이유로 불참을 통보한 반면 ‘과거 없는 남자’로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핀란드의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은 “나는 미국이 철면피한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때 오스카 쇼에 참석할 수 없다”는 내용의 편지를 피어슨에게 보내왔다.
이번 오스카 쇼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는 시상자나 수상자의 반전 발언. 메릴 스트립, 대니얼 데이-루이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등은 반전 핀을 달고 참석하기로 했고 ‘세월’로 감독상 후보에 오른 영국의 스티븐 달드리는 자신이 상을 받으면 전쟁을 비난하는 연설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오스카 시상식 때 정치적 발언을 해 큰 물의를 빚었던 것은 1977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가 ‘줄리아’로 조연상을 받았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의 권익옹호론자인 그녀는 수상 소감에서 “시온주의자 깡패들”이라고 발언, 장내가 난리가 났었다. 또 ‘하노이 제인’ 제인 폰다는 ‘클루트’(1971)로 주연상을 받은 뒤 반베트남전 연설을 했고 ‘대부’(1972)로 주연상을 받은 말론 브랜도는 아파치족 아메리칸 인디언 사친 리틀페더(사진)를 대신 참석시켜 미국의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게 했다.
이번 시상식에 수상 후보나 시상자로 참석할 반전파들로는 수전 서랜든, 마이클 모어, 션 펜 및 리처드 기어 등. 아카데미측은 지금 이들이 무대에서 반전 발언을 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피어슨은 “일단 미이크가 그들 손에 쥐어지면 무슨 소리를 하든 막을 길이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라크 사태와 관련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극단적 보수론을 표명해 온 월스트릿 저널은 이에 관한 사설까지 썼다. 신문은 20일자 사설에서 ‘오스카 전쟁에 가다’라는 제하에 “연예인들은 자신의 명성을 지정학적 전문성으로 착각하는 길고도 영광스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는 그들에게 돈을 더 쓰기 전에 그들이 자신들의 예술적 자유를 보호해 주는 대통령과 군에 대해 당연히 해야 할 말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전쟁의 바람을 맞은 셈이다. 얼마전 나의 반전 칼럼을 읽은 한 독자로부터 전화 메시지가 남겨졌다. 한국 사람이 분명한 영어발음으로 “나는 당신의 글이 마음에 안 든다. 미국에 살면 미국 대통령이 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중 한사람인 애슐리의 말로 대신 응답하고 싶다. “전쟁은 모든 비참을 낳고야 만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도 알지 못한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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