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문제들을 즐겨 다룬 감독 스탠리 크레이머(‘흑과 백’ ‘초대받지 않은 손님’)가 노년에 시애틀 생활을 청산하고 할리웃에로의 컴백을 시도했을 때의 일화다. 명제작자(‘세일즈맨의 죽음’ ‘하이 눈’)이기도 했던 그가 영화 제작을 논의하기 위해 한 메이저 스튜디오의 젊은 고급 간부를 만났는데 이 간부는 대뜸 크레이머에게 “당신 자신에 대해 설명해 보시오”라고 말을 건넸다. 이에 크레이머는 “네 자신에 대해서부터 먼저 설명해 봐라”고 대꾸한 뒤 영화계서 완전히 은퇴했다고 한다.
꽤 오래 전의 얘기지만 이 일화는 요즘 할리웃의 형편을 잘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디즈니, 폭스, 패라마운트 및 유니버설과 WB 등 모든 메이저들은 국제적 대기업의 자회사들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사들의 최고위 간부들은 거의 대부분 변호사나 MBA 출신들로 이들은 영화를 만들어 단숨에 이득을 보려는 기업인들이다. 그들에게 장사가 안되는 의미 있는 영화란 아무 의미가 없으니 메이저 작품들의 질이 나쁜 까닭을 알만도 하다.
이런 장삿속 풍토에서 남들이 다루기 꺼려하는 주제의 영화와 개인적 비전이 뚜렷한 감독의 영화를 서슴없이 제작·배급하고 있는 영화사가 뉴욕에 본부를 둔 미라맥스다. 양질의 영화의 산실이라 불릴 만한 미라맥스의 작품들은 올해 모두 40개 부문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작품상 후보에 오른 5편의 영화중 ‘시카고’와 ‘뉴욕의 갱들’ 및 ‘세월’과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이 모두 미라맥스가 혼자 제작했거나 공동 제작한 영화들이다.
미라맥스(Miramax)는 1979년 하비와 밥 와인스틴 형제가 창설했다. 회사 이름은 자신들에게 영화 사랑을 깨닫게 해준 와이스틴 형제의 모친 미리암과 부친 맥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 유럽 영화와 어려운 주제의 영화들을 사들인 뒤 각 영화의 성질에 따라 획기적인 마케팅 및 배급 전략을 동원해 개봉한다는 것이 회사의 창립 목표였다. 매우 과감한 창업 목표였는데 이 전략이 적중, 미라맥스는 미 영화계의 예술적 성공담의 총아로 부상했고 수년 전부터는 혁신적인 정신을 지닌 작품을 제작하는 독립 영화사의 대부로 등장했다.
미라맥스의 작품은 지난 10년간 모두 11편이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올랐는데 창사 이후 지난해까지 모두 174개 부문서 수상 후보에 오른 바 있다. 1993년 미라맥스는 디즈니에게 팔렸지만 운영은 하비 와인스틴 회장의 전권 하에 이뤄지고 있다(공동회장인 하비의 동생 밥은 미라맥스의 자회사 디멘션을 운영하고 있다).
미라맥스의 성공은 하비 와인스틴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모험성 및 근면에 의해 달성됐다. 하비는 사랑이 우선이고 장사는 두번째라는 자세로 영화를 만드는데 그래서 그는 왕년의 대담한 명제작자들이었던 새뮤얼 골드윈, 데이빗 O. 셀즈닉, 대릴 F. 재눅 및 해리 콘 등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들은 ‘모굴’(Mogul)이라 불렸는데 하비 와인스틴은 현대판 모굴인 셈이다.
하비는 영화에 대한 정열과 어느 주제에 관한 뛰어난 예술적 감식력을 지닌 데다 개인적 안목이 뚜렷한 감독은 위험을 무릅쓰고 밀어주는 선견지명이 있는 제작자다. 올해 오스카상 10개 부문서 후보에 오른 ‘뉴욕의 갱들’과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영국인 환자’(1996)는 모두 하비가 아니었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들이다.
성공한 사람은 적도 많게 마련인데 특히 하비는 독재적이요 성질이 고약해 할리웃에서는 하비라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스모 선수 같은 체구에 멧돼지처럼 생긴 하비는 자기 목표를 위해서는 욕설과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는 저돌적인 사람으로 영화를 자기 마음대로 가위질하기로 유명해 ‘가위 손 하비’로 불린다. 선댄스 영화제서 하비와 저녁을 먹은 적이 있는 내가 아는 한 홍보회사의 부사장은 “하비는 밥 먹는 것도 지저분하고 입도 몹시 걸더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하비는 특히 오스카에 대한 애착이 강해 물량 공세를 총동원한 오스카 캠페인을 시작한 장본인. 1998년 미라맥스의 ‘사랑에 빠진 셰익스피어’가 드림웍스의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을 뜻밖에 누르고 오스카 작품상을 받은 것은 하비의 더티 플레이도 마다 않는 캠페인의 결과였다.
하비 와인스틴이 만드는 영화가 모두 예술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있는 한 할리웃에서는 악화가 양화를 완전히 구축하지는 못할 것이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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