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장미와 초컬릿의 날 밸런타인스 데이. 인도 정부는 이 서양풍습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며 배척운동을 벌이려 한다는 보도도 있지만 이제 밸런타인스 데이는 점차 세상 사람들의 사랑의 날로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364일은 사랑은 나 몰라라 하다가 이날 하루 갚음이라도 하듯 사랑의 북새질을 치는 것 같아 입안이 떨떠름하긴 하지만.
어쨌든 나도 밸런타인스 데이 선물을 마련했다. 감정적으로 성숙한 어른들을 위한 몇 편의 로맨틱한 영화들. 이 영화들의 사연은 컴퓨터가 아닌 펜으로 쓴 내출혈 같은 이루지 못할 사랑의 이야기들로 그 사랑의 행적이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실적인 것이어서 감동의 진동이 격렬하다. 이런 영화들을 보노라면 남진의 노래대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말을 절감케 된다.
먼저 ‘자, 항해자여’(Now, Voyager·1942)로 밸런타인스 데이의 로맨스 항해를 떠나보자. 손수건이 열두 장 정도는 필요한 감상적이면서도 만개한 백합처럼 순백하니 아름다운 영화다. 병적으로 소심한 노처녀 샬롯(베티 데이비스)은 남미행 여객선에서 유부남 제리(폴 헨리드)를 만나 생애 처음 사랑의 기쁨에 휩싸인다. 그러나 제리는 아내를 떠날 수 없는 몸. 둘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에서 행복을 구한다. 샬롯이 “달을 원해선 안되겠지요. 우리에겐 별들이 있으니까요”라고 제리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가 심장에 별처럼 쏟아져내려 박힌다. 오스카상을 받은 맥스 스타이너의 슬프고 서정적인 음악도 좋다.
배를 타고 떠난 여행은 이제 ‘짧은 만남’(Brief Encounter·1945)의 두 주인공이 매주 한번씩 만나는 영국의 한 한적한 기차역에 당도했다. 모두 기혼자인 로라(실리아 존슨)와 알렉(트레버 하워드)은 둘이 우연히 만나 사랑이 싹튼 이 기차역에서 매주 목요일 만나고 헤어진다. 둘은 죄책감에 시달리고 고통하면서도 ‘다음 목요일’이라는 언약 때문에 또 한 주일을 기다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의 폭력행사가 일어나면서 두 연인이 겪어야 하는 희열과 슬픔을 시적 아름다움으로 그린 영국 작품이다. 결국 로라와 알렉은 일상의 칙칙한 안전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고 마는데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 제2번의 서러운 주제가 영화의 염세적 분위기를 애처롭게 동반해 주고 있다.
로버트 드 니로와 메릴 스트립이 나온 ‘사랑에 빠질 때’(Falling in Love·1984)는 ‘짧은 만남’을 연상케 한다. 미국 영화여서 드 니로와 스트립은 로라와 알렉과는 달리 해피엔딩으로 달리는 기차를 함께 타지만.
사랑의 여정은 이제 9월의 나폴리에 닿았다. 중년의 기혼남자 데이빗(조셉 카튼)과 아름다운 여류 피아니스트 마니나(조운 폰테인)의 못 이룰 사랑을 그린 ‘9월의 연정’(September Affair·1950).
두 사람은 나폴리 관광에 나섰다가 타고 온 여객기를 놓친다. “일상적인 부탁이 아니다”며 함께 나폴리에 머물자는 데이빗의 요구에 마니나는 “우리 일상적이지 말아요”라며 응한다. 며칠 후 둘이 놓친 여객기가 추락, 자신들이 사망자 명단에 오른 것을 알게 된 데이빗과 마니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플로렌스에 새 삶의 보금자리를 차린다. 그러나 두 사람은 현실을 떨쳐내지 못하고 헤어지고 만다. 영화에 나오는 ‘9월의 노래’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곡이다.
이번에는 ‘여정’(Summertime·1955)이 여름 동안 잠시 머문 베니스를 찾아가자. 미국서 관광차 베니스를 방문한 노처녀 교사 캐서린 헵번은 이탈리안 유부남 로사노 브라지와 여름밤처럼 짧은 사랑을 나눈 뒤 기차를 타고 떠난다. ‘짧은 만남’의 로라처럼 기차 창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헵번의 모습이 간절하다. 이 영화의 음악도 아름답다.
사랑은 청춘과 중년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호주 영화 ‘순결’(Innocence·2001·사진)은 첫 사랑을 반세기만에 재회, 사랑이 재점화되면서 겪는 70대 노인들의 당황과 주저와 희열을 그린 황혼의 멜로 드라마다. 7순 남녀의 감정적 육체적 사랑이 아름답고 육감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마저 느끼게 된다.
음악가 홀아비 안드레아스와 남편이 있는 클레어는 다시 찾은 사랑을 여관과 교외에서 불태우는데 끝에 가서 한 사람이 죽지만 그것은 행복한 죽음이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 셈이다. 모두 사무치게 아름답고 슬프며 또 고상한 영화들이다. 비디오와 DVD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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