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에 참석하는 기쁨은 일반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세계 각국의 영화들을 본다는 데 있다. 지난 7일부터 17일까지 선셋과 바인에 새로 지은 아크라이트 극장에서 열렸던 AFI(미 영화학회)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도 그런 기쁨을 만끽했다. 생기발랄한 하바나 우체국 여직원의 무료를 통해 관료주의를 우습고 신랄하게 비판한 쿠바 영화 ‘나싱 모어’ 같은 것은 영화제가 아니고서는 보기 힘든 작품이다. ‘당신을 감동시킬 것입니다’라는 모토를 지녔던 이번 영화제에는 전세계 37개국에서 모두 147편(장·단편·기록영화)을 출품했다. 한국에서도 임권택의 ‘취화선’과 이정향의 ‘집으로’가 ‘아시안 뉴클래식’ 부문에 출품됐는데 특히 ‘집으로’(현재 LA와 패사디나 및 어바인서 상영중)에 대한 반응이 좋았다.
해마다 9월에 열리는 토론토 영화제와 11월에 열리는 AFI 영화제에 참석할 때마다 나는 진수성찬을 맞은 굶주린 자처럼 마음이 급해진다. 식음을 전폐하고서라도 가능한 한 많은 영화를 보려고 애쓰는데 이번에 본 영화는 35편정도. 휴가를 내서 아침부터 밤까지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무며 영화를 봤는데(토론토 생각이 났다) 심신이 피곤해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AFI 영화제(감독 크리스천 게인스)는 축소판 토론토 영화제를 닮아가고 있다. 수년 전만해도 큰 반응을 받지 못하던 이 영화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눈부신 성장을 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장소를 과거의 할리웃 이집션 극장에서 시설과 규모가 훨씬 나은 아크라이트 극장으로 옮겨 한 장소의 여러 스크린에서 영화를 집중적으로 상영, 참가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리고 영화제의 규모와 작품의 질도 보다 커지고 다양하며 또 향상됐는데 세계 최초상영 영화가 21편이었다. 토론토 영화제서 호응을 받은 여러 작품이 여기서도 역시 관객들의 인기를 샀다. 개막 작품으롸 덴젤 워싱턴의 감독 데뷔작인 ‘앤트원 피셔’와 폐막 작품인 스페인의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그 여자에게 말해’ 그리고 화가시절의 히틀러와 화상과의 관계를 그린 ‘맥스’, 시적이요 명상적인 프랑스 갱스터 영화 ‘기차 안의 남자’ 및 연기파 레이프 파인스가 정신분열증자로 나와 호연하는 ‘거미’등이 그런 영화들. 올해 내가 본 외국어 영화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브라질 달동네 소년 갱들의 이야기인 ‘신의 도시’와 오늘 개봉된 사랑의 드라마이자 정치 스릴러인 ‘조용한 미국인’ 등도 표가 매진됐다.
미국의 두 베테런 스타인 존 말코비치와 니콜라스 케이지가 각기 감독으로 데뷔한 ‘2층의 무용수들’과 ‘소니’도 관객들의 관심을 모은 작품. ‘2층의 무용수들’은 조직적 테러에 시달리는 부패한 라틴 아메리카의 이상가인 형사(하비에르 바르뎀-그가 영화를 소개하고 영화 후 관객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가 경험하는 도전과 고뇌를 얘기했다. ‘소니’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영화로 뉴올리언스 홍등가에 사는 젊은 남창의 이야기. 두 영화는 두 스타의 평소 작품기호와 스타일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데 모두 정열적인 영화이긴 하나 초년생의 한계를 느끼게 했다.
내가 이번에 가장 감동깊이 본 영화는 폴란드의 베테런 감독 크리스토프 자누시의 ‘보충’(Supplement·사진)이었다. 이 영화는 폴란드서 날아온 자누시가 직접 소개했는데 그의 전작인 ‘치명적인 성적으로 옮겨진 병으로서의 삶’의 반속편이자 반동반작이다.
의대생인 신심이 깊은 청년이 세속적인 삶과 종교적인 삶의 선택의 기로에서 울고불고 고통하면서 고뇌하는 내용. 그의 고뇌는 자기를 깊이 사랑하는 애인 때문에 무게를 더 하는데 철학적이요 종교적이며 아름답고 숭고한 작품이다. 이런 영화가 일반 극장에서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밖에도 시실리 부근 한 작은 섬의 자유분방한 아내의 영육의 몸부림을 육감적으로 그린 이탈리아/프랑스 영화 ‘호흡’과 시간대를 마음대로 넘나드는 천년사랑의 일본 만화영화 ‘천년 여배우’ 그리고 눈부시게 찬란한 화면 위에 젊은 스님의 육체적 욕망과 깨달음을 유려하게 펼쳐놓은 인도/독일 영화 ‘삼사라’등도 인상적이었다. ‘삼사라’의 섹스 신은 여태껏 어느 영화에서도 못 본 희한한 것으로 마치 비밀 섹스교본의 실연 장면을 보는듯 해 얼굴이 화끈하니 달아 올랐다.
영화제의 유감(?)이라면 영화제 모토를 묘사한 본 영화 상영 전에 나오는 트레일러들. 수준미달로 토론토 영화제의 트레일러를 보고 배워야겠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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