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아름답고 섹시한 본드 걸들이다. 007 시리즈의 제1편인 ‘닥터 노’(1962)의 어슐라 안드레스부터 내달 22일에 개봉될 ‘다른 날 죽다’의 할리 베리에 이르기까지 본드 걸들은 지난 40년간 본드처럼 하나의 문화적 우상이 되어왔다.
본드 걸들의 진화는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변화와 일치한다. 초기 본드 걸들은 부러진 날개의 천사요 천진난만한 미녀로 시작해 사악한 암 여우와 전투의 동지로 변모해 왔다. 수동적 성적 대상에서 힘을 갖춘 동반자로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풍만한 몸매의 눈부시게 섹시한 여자들로 본드의 적이건 동지건 간에 늘 그와 함께 정사를 나눈다는 것.
특히 제5대 본드인 피어스 브로스난부터 본드 걸들은 강력하고 결단력 있고 자신만만한데 ‘내일은 죽지 않는다’(1997)의 본드 걸 미셸 여는 주먹과 발로 닥치는 대로 적을 때려 눕혔다. 여성파워의 신장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현재 본드의 상관인 영국 첩보기관 MI6의 보스인 M이 여자라는 점. 시리즈 처음부터 ‘문레이커’(1979)에 이르기까지 M으로 나왔던 버나드 리가 ‘골든 아이’(1995)서부터 주디 덴치로 바뀌었다. 덴치가 영화에서 본드에게 “너는 여자 알기를 우습게 아는 냉전시대의 공룡 같은 존재”라고 차갑게 비판하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이쯤 되면 본드 걸이 아니라 본드 우먼이라 불러야 좋을 듯 하다.
본드 걸 제1호였던 안드레스의 충격적인 출현을 능가하는 모습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비키니 차림의 안드레스가 자메이카 해안의 푸른 파도를 뒤로하고 백사장으로 걸어 나오는 장면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케 하는 황홀한 본드 걸의 탄생이다. 안드레스는 아직도 최고의 본드 걸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21세기 본드 걸 할리 베리는 ‘다른 날 죽다’에서 안드레스와 같은 모습으로 나와(사진) 초대 본드 걸을 치하한다.
본드 걸의 등장은 60년대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와 성의 혁명을 반영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사회 관습이 느슨해지던 ‘스윙잉 60년대’의 부산물인 셈.
‘007 위기일발’(1963)서 두번째 본드 걸로 나온 다니엘라 비앙키가 알몸에 까만 초커 하나만 걸치고 본드를 유혹하던 모습 또한 아찔하니 자극적인 장면이다. 그의 자극미를 비웃기라도 하듯 가차없이 사람 잡는 본드 걸이 국제암살단 스펙터의 자객 로테 레냐. 레냐는 구두 앞굽에 장치된 독 묻은 칼로 본드를 위협, 본드가 혼이 난다.
최고의 본드 걸이 안드레스라면 본드 걸의 디바는 ‘골드핑거’(1964)의 비행사 오너 블랙만. 블랙만은 푸시 갤로어(농담이 좀 심했다)로 나와 본드에게 저항하다 키스를 나누는데 영화에서 푸시는 레즈비언임이 암시된다. 이 영화에서 잠깐 나와 본드와 침대에 들었다가 온몸이 도금된 채 사망한 셜리 이튼도 잊지 못할 본드 걸이다.
본드 걸역은 배우로서 축복이자 저주라고 토로한 본드 걸은 ‘선더볼 작전’(1965)의 요부 루치아나 팔루치. 이탈리아의 스타였던 팔루치는 본드 걸로 나온 죄(?)로 그 뒤 펠리니 같은 거장들이 그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요즘 본드 걸이 오스카상을 탄 할리 베리와 데임 주디 덴치라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대조적이다. 이때만 해도 본드 걸들은 순전히 눈요깃거리로 본드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일이어서 여권론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평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또 다른 육체파 본드 걸 질 세인트 존(‘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1971)은 “어떻게 우리를 심각히 생각할 수가 있느냐”며 “본드 걸역은 진짜 재미있었다”고 반박한다.
플레이보이 본드는 딱 한번 결혼한 적이 있다. 두번째 본드가 된 조지 레젠비는 ‘여왕폐하의 007’(1969)에서 다이애나 릭과 결혼하나 이 본드 부인은 결혼식 직후 암살 당한다.
이밖에도 제인 시모어, 바브라 박, 캐롤 부케, 브릿 에클랜드, 모드 애담스, 그레이스 존스, 팸키 잰슨, 소피 마르소 등이 다른 본드 걸들이지만 옛날 본드 걸들만 못하다. 본드 걸 중 가장 우아한 여자는 아마도 모니페니일 것이다. M의 비서인 모니페니는 본드를 짝사랑하다 속만 태우는데 첫 편부터 ‘뷰 투 어 킬’(1985)까지 모니페니로 나왔던 로이스 맥스웰은 참 멋있는 여자였다.
본드 걸에는 한가지 징크스가 있다. 역대 본드 걸 치고 배우로서 성공한 사람이 거의 없다. AMC TV는 11월6일 하오 8시 역대 본드 걸의 역사를 담은 특집프로 ‘본드 걸은 영원하다’를 방영한다. 해설과 인터뷰는 최악의 본드 걸 중 하나였던 마리암 다보(‘리빙 데이라이츠’·1987).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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