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늘하니 제법 가을 날씨다. 남자의 가슴에 난 구멍을 통해 바람맞은 상념들이 머리채를 날리며 들락거리는 계절이다.
나는 삶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셉템버 송’(September Song)을 자주 듣는다. 자지러지게 피곤하고 애수가 깃든 이 노래를 나는 처음 중년의 유부남과 아름다운 피아니스트의 못 이룰 사랑의 영화 ‘셉템버 어페어’(September Affair·1950)에서 들었다. 윌터 휴스턴(명장 존 휴스턴의 아버지)이 녹슨 쇳소리의 떨리는 음성으로 부르는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긴 독백에 이어 ‘5월부터 12월까지는 참으로 길고 길기도 하지요/ 그러나 9월이 오면 날들은 짧아지지요/ 가을 날씨가 나뭇잎들을 불태우면 이미 기다림의 놀이를 할 시간은 없답니다/ 왜냐하면 날들은 점점 사라져 귀중한 몇 날만이 남기 때문이지요/ 9월… 11월/ 그리고 이 소중한 몇 날들을 나는 당신과 함께 보내렵니다/ 당신과 보내렵니다’ 아름답고 슬픈 이 노래는 독일의 클래시칼 음악 작곡가 쿠르트 바일이 지었고 미 극작가 맥스웰 앤더슨이 작사했다.
9월이 지나고 10월이 찾아들면서 가을이 깊은 모양을 갖추는 요즘 나는 일본의 뛰어난 작곡가 토루 타케미추(1930~ 1996·사진)의 가을 모음집 ‘가을 정원에서’(In an Autumn Garden-Deutsche Grammophon 출반)를 들으며 그 뜰을 선율로 산책한다.
일본 고유의 전통적 개념과 서양의 아방-가르드 사이를 마음대로 사뿐하니 드나들어 동양과 서양의 중재자라는 평가를 받았던 타케미추의 음악은 소리의 그림이다. 색깔 있는 소리와 침묵의 시와도 같은 그의 음들은 신비한 의문부호 같다. 그것들은 속삭이며 끊임없이 흐르면서 잔잔하고 아름다운 다색의 풍경화를 만드는데 듣노라면 소리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듯한 사실감과 황홀감에 젖게 된다.
클래시칼 뮤직 작곡가요 영화음악 작곡가이자 현대음악의 열렬한 옹호자인 타케미추는 드뷔시(일본의 드뷔시라 불린다)와 메시앙 그리고 재즈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음악은 나뭇잎과 꽃과 산책 그리고 풍경이 있는 일본 정원에 비유되곤 한다. 타케미추의 음악은 특별한 음악적 구조나 강렬한 리듬이 배제된 채 매우 느린데 그저 불현듯 들리는 소리라고 할 수 있겠다.
타케미추는 “일본인으로서의 전통과 서양인으로서의 혁신을 개발하고 싶다”면서 “침묵과 같은 강렬한 음들을 생산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전통악기와 서양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그의 음악을 들으면 그의 이런 뜻을 감지할 수 있다. 가장 진보된 기술과 일본 음악의 의식적이요 엄격한 언어의 상반된 전통을 음악세계 안에서 통합시킨 음악가인 타케미추는 또 자신은 가능하면 음을 통제하지 않고 음을 모아 그것들을 부드럽게 내보내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 자신의 작곡 의도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현대음악사에서 가장 독특한 개인적 스타일을 갖추면서도 다채로운 변화를 추구한 타케미추의 음악을 풍성히 직조되고 절묘한 균형을 이룬 느린 음들의 직물이라고 찬양한다. 라르고와 안단테로 소리의 피륙을 짜고 산수화를 그린 사람이라고 하겠다.
타케미추는 아키라 쿠로사와와 쇼헤이 이마무라 등 일본의 거장 감독들의 영화를 포함해 100곡에 가까운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란’ ‘모래언덕의 여인’ ‘하라키리’ ‘열정의 제국’ 등이 그가 음악을 지은 작품들이다.
‘가을 정원에서’는 ▲‘가을 정원에서’ ▲‘항해’ ▲‘가을’ ▲‘11월의 계단들: 10번째 계단’ ▲‘일식’ 등 다섯 편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일본 고유의 현악기인 비와와 피리인 샤쿠하치를 오케스트라의 음과 서로 대비하고 또 조화를 시도하고 있는데 소리의 파노라마를 목격하는 감동을 받게 된다.
길고 나른한 ‘가을 정원에서’는 무수한 음들이 아우성을 친다. 불길한 유혼의 호소와 칭얼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 비명과 바람과 새와 산사의 고요와도 같은 소리들이 반복되면서 서로 끌어안고 씨름을 한다.
‘항해’와 ‘가을’에서도 이런 불혐화음과도 같은 음들이 온갖 자연음과 섞여 진실로 저무는 계절의 아름다움과 명상을 연무처럼 자아내고 있다.
‘11월의 계단’은 뉴욕 필 창단 125주년 기념 작품이고 ‘일식’은 샤쿠하치와 비와를 위한 실내악이다. 타케미추의 생애 후반기 10년간의 음악을 모은 ‘꿈의 인용구’(Quotation of Dream)도 역시 도이체 그라마폰에 의해 나왔다. 가을을 위한 심오한 소리들이다.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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