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잇장처럼 얇은 입술에 과묵한 코주부 장 가방은 2차대전 전의 프랑스 시네마를 정의 내린 배우였다. 가방과 프랑스 영화는 동의어로 그는 3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절대적 분위기였던 로맨틱한 염세주의를 상징했던 사람이었다.
30년대 프랑스 영화계는 시적 사실주의 영화인들이 주도했는데 이들의 작품은 하나같이 숙명적이었다. 주인공은 운명에 시달릴 대로 시달리다가 자살하거나 살해당했다. 전쟁의 암운이 하늘을 가린 당시 프랑스 사람들의 절망과 염세주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헝겊 캡을 쓴 외디퍼스’라 불렸던 가방은 운명을 트렌치 코트처럼 걸치고 다니는 저주받은 영웅(또는 반영웅)으로 기억될 만큼 비극적이요 숙명적이며 또 어두운 영화에 많이 나왔다. 가방은 전전과 전후 통틀어 40여년에 걸친 배우생활을 했지만 가방 하면 세속적인 국외자요 고독자가 연상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방은 많은 영화에서 자기를 파괴하려는 잔인한 운명과 투쟁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나왔다. 고독이라는 중병을 앓은 뒤 순수한 사랑을 찾아 잠시 위로를 받으나 또 다시 기만당하고 자신의 모든 꿈을 빼앗겨 살인을 저지르고 자살하거나 총에 맞아 죽었다. 그는 이런 자의 모습을 강렬한 개성으로 표현해 ‘우리시대 영화의 비극적 영웅’(앙드레 바 장)이라 불렸었다. 행복하고는 참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가방의 이런 모습이 아름답도록 숙명적으로 나타난 영화 중 하나가 ‘안개 낀 항구’(Le Quai des brumes·1938·원제는 그림자의 항구-’항구의 마리’와 함께 13일 상영)다. 마르셀 카르네가 감독하고 시인이자 각본가인 자크 프레베르가 쓴 이 영화는 숙명과 비극성과 절망감이 안개처럼 자욱한 회색의 걸작이다.
탈영병으로 나온 가방은 항구도시 르 아브르에서 남미로 도주하기 위한 여권을 얻으려고 애쓴다. 그는 부둣가의 한 싸구려 술집에서 운명의 폭풍에 시달리는 순수한 넬리(눈이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미셸 모르강)를 만나 사랑하게 되나 결국 살인을 저지른 뒤 남미행 배가 정박한 항구로 가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안개와 음습한 기운과 불길한 분위기를 찍은 흑백촬영이 숨가쁘게끔 아름다운 이 영화를 보면 염세적인 운명은 어떤 색채와 모양이며 느낌을 가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프랑스의 괴뢰정권 비시 정부의 대변인이 "프랑스가 전쟁에 진 것은 ‘안개 낀 항구’ 때문이다"라고 말했던 영화로 나치 점령 하 프랑스서 상영이 금지됐었다.
카르네와 프레베르와 가방이 다시 손잡고 만든 또 다른 절망적인 걸작이 ‘새벽’(Le Jour se leve·1939·흑백·사진-’사랑의 입’과 함께 6일 상영).
사랑과 희망을 잃고 살인을 한 뒤 자기 아파트에 갇힌 고독한 킬러의 이야기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공장 노동자인 프랑솨(가방)와 두 여인 그리고 이 두 여인을 소유한 사악한 남자와의 기구한 인연이 그려지는데 분위기가 어찌나 암담한지 이 영화도 국내 상영이 금지됐었다.
가방이 저주받은 영웅을 맹렬하게 표현한 또 하나의 작품이 ‘인간 짐승’(La Bete humaine·1938·흑백-가방의 할리웃 작품 ‘문파이드’와 함께 14일 상영). 에밀 졸라의 소설이 원작으로 장 르놔르(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의 아들)가 감독한 장렬한 필름 느와르이다.
가방은 유전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폭력성을 지닌 기관사로 나와 역장의 아내(시몬 시몽)와 사랑을 한다. 시몬은 가방에게 자기 남편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나 가방은 이 부탁을 수행치 못하고 광분, 시몬을 목 졸라 죽이고 자신은 달려오는 기차에 투신 자살한다.
가방은 영화 ‘페페 르 모코’(Pepe le Moko·1937·흑백-’불행한 사건’과 함께 26일 상영)에서는 파리서 은행강도를 한 뒤 알지에의 달동네 카스바에 숨어살다가 여자 때문에 자살을 했으니 영화에서 자살을 가장 많이 한 배우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LA카운티 뮤지엄(5905 윌셔)은 9월6일부터 21일까지 뮤지엄 내 빙 극장에서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하오 7시30분부터 장 가방의 명화들을 2편씩 묶어 상영한다. 반전영화의 걸작 ‘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1937·흑백-’파리의 교차로’와 7일 동시 상영)과 컬러가 화려한 춤과 노래가 있는 ‘프렌치 캉-캉’(French Can-Can·1955-’희열’과 21일 동시 상영)도 상영된다. (323)857-6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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