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95세로 타계한 빌리 와일더는 글재주가 뛰어난 감독이었다. 그가 각기 따로 함께 일한 찰스 배래켓과 I.A.L. 다이아몬드와 공동 집필한 일련의 명작들은 ‘글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탁월한 문장과 대사를 갖춘 것들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것은 유대인인 그가 나치를 피해 1934년 무일푼으로 할리웃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와일더는 영어를 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와일더는 독일 배우 피터 로레와 동거하면서 라디오를 듣고 영화를 보면서 영어를 배웠다. 하루에 새 단어 20개씩을 습득했다. 그런 사람이 미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각본을 써 오스카상까지 탔으니 확실히 그는 타고난 문장가이다.
이런 글 솜씨는 어쩌면 와일더가 베를린서 기자생활을 할 때 갈고 닦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미국에 건너오기 전 베를린 최대 타블로이드의 사건폭로 기자로 활약했었다. 허구가 아닌 어두운 사실을 보도하던 그의 글 솜씨는 후에 필름 느와르 ‘이중 배상’ 같은 작품에서 재현되었음을 느끼게된다. 촌철살인의 글이다.
와일더의 영화 ‘제17 포로수용소’에 주연, 오스카 주연상을 탄 윌리엄 홀든은 와일더를 "면도날로 가득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표현한 바 있다. 와일더는 저돌적으로 솔직하고 사악할 만큼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독기 서린 위트와 유머감각의 소유자였다.
이런 특징은 와일더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인 ‘선셋대로’에서 흘러간 무성영화 스타 글로리아 스완슨이 쏜 총에 등을 맞고 풀에 눈을 뜨고 엎드린 채 떠있는 젊은 기둥서방 윌리엄 홀든의 독백에서 잘 나타난다. 죽은 자가 "불쌍한 바보 그렇게 풀을 갖고파 하더니 마침내 온통 갖게 됐구먼"이라며 자조한다.
또 홀든은 ‘제17 포로수용소’에서 동지들을 남겨둔 채 탈출하면서 "야 이 등신들아 너희들 이 다음에 길에서 날 만나도 아는 체 하지마"라는 말을 남겼다. 매정하기 짝이 없는 친구다.
와일더의 새카만 유머와 쥐어뜯는 듯한 야유가 극치를 이룬 ‘선셋대로’는 부식한 인간들의 산기 있는 설전이 판을 치는 영화. 자기를 먹여주고 입혀주는 할리웃을 짓씹어 댄 이 영화를 본 루이 B. 메이어 MGM 사장은 "이 와일더라는 자를 이 동네서 내쫓아야 해. 자기를 먹여주는 동네에 치욕을 가져온 친구야"라며 노발대발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후에도 이 동네서 잘 먹고 잘 살며 팬과 비평가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다가 이 동네를 떠났다.
와일더는 1938년부터 1950년까지 브래켓과 함께 글을 썼다. ‘니노치카’ ‘정열덩어리’ ‘이중 배상’ ‘잃어버린 주말’에 이어 ‘선셋대로’로 두 사람의 글은 절정을 이룬다. 특히 부패한 보험회사 사원과 살인적인 아내가 욕정과 돈에 눈이 멀어 여인의 남편을 살해하는 ‘이중 배상’에서 두 간부가 주고받는 사악하고 성적인 대사의 조롱기는 거의 치명적이다.
와일더는 ‘하오의 연정’을 시작으로 1957년부터는 I.A.L. 다이아몬드와 함께 각본을 썼다. 둘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섹스 소극 ‘뜨거운 것이 좋아’야말로 매스터피스라는 말이 어울리는 영화다. 죽이겠다고 쫓아오는 갱을 피해 여장을 하고 여성 밴드단원으로 위장한 잭 레몬과 토니 커티스가 나누는 대사를 듣노라면 너무 우스워 배꼽이 빠져 달아나는 줄도 모를 지경이다.
특히 마지막 대사는 지금도 농담에 자주 인용되는 명언. 여장한 잭 레몬 (사진·와일더와 레몬)이 자기에게 반해 죽어라하고 쫓아다니는 돈 많은 노인 조 E. 브라운의 구애를 견디다 못해 "나는 남자란 말이야"라고 말하자 입이 몹시 큰 브라운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완전한 사람이라곤 없어"("Nobody’s perfect.")라고 응수한다.
와일더와 다이아몬드의 글이 달짝지근한 감상성이 섞여 아름답게 피어난 작품이 사랑의 동화 같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줍니다’이다. 이간의 탐욕을 조롱하면서도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로맨티시스트들을 위한 주옥같은 영화다.
와일더가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선택했으면서도 이 나라와 할리웃을 냉소적으로 본 까닭은 그가 궁극적 이방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건기자의 객관성을 지녔던 유럽인 와일더에게 미국은 결점 있는 약속의 땅이었을 것이다. "나는 칵테일에 약간의 초를 타는 것을 좋아한다"며 신소리를 끝까지 견지했던 와일더는 지금쯤 저승에서 ‘뜨거운 것이 좋아’의 속편 마련 차 지옥 방문을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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