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부시가 이라크와 이란과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지칭한 발언이 말 같지도 않아서 그냥 무시해 왔다. 그런데 최근 제임스 울시 전 CIA 국장이 이와 관련해 월스트릿 저널에 기고한 내용이 너무나 과대망상적이자 아전인수격이어서 몇 마디 하게 됐다.
부시의 선배인 레이건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공격한 바 있지만 악이라는 말은 그렇게 함부로 쓰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적 단어이다. 나는 부시가 의회서 행한 올 연두교서 연설에서 ‘악의 축’ 운운하는 모습을 보면서 입에서 침을 튀기며 신도들에게 저주와 형벌로 협박하는 광적인 전도사를 연상했었다.
울시는 아마도 부시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많자 신문에 기고를 한 듯하다. 그런데 그 기사가 내 심기를 언짢게 한 까닭은 그가 미국을 서부영화의 기념비적 작품 ‘하이 눈’의 정의롭고 고독한 영웅인 보안관 윌 케인(게리 쿠퍼)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하이 눈’(1952)은 뉴멕시코의 작은 마을 해들리빌의 보안관 윌이 퀘이커 교도인 에이미(그레이스 켈리)와 결혼하고 마을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때 윌이 잡아 옥에 보낸 흉악범 프랭크와 그의 일당 3명이 윌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정오에 도착하는 기차를 타고 온다. 윌은 모른 체하고 떠나라는 마을사람들의 권고를 무시하고 프랭크는 자기 책임이라며 마을에 남아 자기를 도와줄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무도 윌의 요청에 응하지 않자 윌은 혼자 프랭크 일당을 맞는다. 그를 돕는 유일한 사람은 에이미. 적을 처치한 윌은 마을사람들 앞에서 보안관 배지를 땅에 던지고 에이미와 함께 떠난다.
울시는 글에서 미국이 세계의 악에 도전하는 윌이고 영국(에이미역)을 제외한 프랑스 등 나머지 유럽 국가들은 자기 편리만 생각하는 해들리 주민들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유럽 국가들은 무조건 미국이 확고히 여기고 또 옹호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죄의식을 갖고 경멸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는 보안관은 무슨 희생이 있어도 남을 보호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며 그것은 양이 되는 대신 양치기가 되기를 결정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울시는 또 보안관은 다른 사람들은 변명을 찾아내 싸움을 피한다 할지라도 본인은 결코 자신의 의무를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고 자화자찬했다. 글은 "유럽 사람들이여 집에 가 애나 봐라. 그리고 모든 게 끝났을 때 우리가 배지를 땅바닥에 버리지 않도록 기도나 해라"며 끝을 맺었다.
울시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알 바 없으나 ‘하이 눈’ 속에는 50년대 초 당시의 매카시즘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 영화의 각본을 쓴 칼 포어맨은 극우파들에 의해 조성된 공산당 때려잡기의 희생자였다.
포어맨이 각본을 쓸 당시 그는 의회조사위 출두 소환장을 받았었는데 의회서 묵비권을 행사해 ‘숙청’ 당한 끝에 영국으로 달아나야 했다. 그런데 후에 미국 대통령이 된 배우 로널드 레이건은 당시 동료들을 고발한 밀고자 중 하나였다. 포어맨의 이런 용기는 케인이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아내와의 이별과 죽음마저 감수했던 그 용기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윌의 도움 요청을 묵살한 마을사람들은 매카시즘의 동조자들인 셈이다. 이 영화가 만든 지 반세기가 되는데도 큰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신의 내적 공포를 이겨낸 사람의 용감한 이야기라는 시대를 넘는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현령 비현령이라고 울시는 자기 같은 극우파들을 비판한 영화를 끌어다가 제 자랑하고 있으니 자다가 웃을 일이다. 더구나 CIA는 온 세계서 못된 짓은 혼자 다 맡아하다시피 하는 첩보기관이 아닌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남의 나라에 쿠데타를 사주해 현직 대통령을 살해시키고 자기 국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를 자기 집 안방처럼 드나들며 온갖 음모와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 국제적 조폭기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시는 ‘악의 축’들이 대량 살상무기를 만든다고 비난했지만 미국이야말로 그런 무기를 대량 생산해 팔아먹는 대표적 국가라는 사실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뉴욕타임스도 말했듯이 ‘악의 축’이라는 말은 무절제한 발언이다. ‘강대국의 흥망’의 저자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도 미국이 너무 일방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힘세다고 제멋대로 하면 미움을 사는 법. 케네디 교수는 미국이 미움을 안 사려면 일방주의에서 벗어나 민주주의와 공정성·개방·인권 등 과거의 미국적 이상들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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