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남의 아파트 주위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빨간 동백꽃을 보고 문득 나의 동해안에서의 군인시절이 떠올랐다. 파도 타고 넘어오는 간첩 잡는다고 강원도 동해안 보초생활로 보낸 군대생활이었다.
겨울바다는 매서웠다. 버림받은 여인의 독기 서린 눈매 같은 겨울바다 바람을 맞으며 초소로 가는 절벽 길가에는 객혈을 하는 동백꽃들이 즐비했다. 추운 겨울에 피는 꽃이 마치 너무 뒤늦게 징집돼 어색해하는 나처럼 주위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아프도록 아름다웠다.
"솨 솨" 하는 바다소리를 들으며 파도의 달려드는 새파란 색깔과 내리 쬐는 황금햇살을 받느라 견디어 내는 동백꽃의 새빨간 안간힘을 보면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부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하는 가사가 어찌나 내 신세를 얘기하는 것 같은지 부탁 없는 앙코르를 부르며 고독을 달래곤 했다.
’동백꽃’ 하면 유명한 게 김유정의 단편. ‘마름집 딸 점순이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쓰러지면서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흐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정신이 그만 아찔하였다.’ 그 냄새는 과연 동백꽃 냄새일까 아니면 점순이의 냄새일까. 순백한 에로티시즘이 구구 절절한 장면이다.
지금 데스칸소 가든에는 동백꽃이 한창이다. 동백꽃은 흰 꽃과 붉은 꽃이 많은데 역시 붉어야 동백이다. 그 붉음이 마치 여인들이 생명 잉태의 가능성을 절규하느라 쏟아놓는 뜨거운 선혈 같아 고귀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꽃말을 가진 동백꽃은 질 때는 가장 아름답게 핀 상태에서 마치 모가지가 부러지듯 송이째 툭 떨어진다고 한다. 절개가 있는 꽃인데 떨어진 꽃잎들을 정성껏 줍는 아름다운 사람은 그대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동백꽃이 절실히 아름다운 까닭은 그 반어적이요 저항적인 의미 때문일지도 모른다. 겨울에 피는 꽃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거역하는 순교자적 각오마저 엿보인다.
’동백 아가씨’가 딱히 이미자 하나 뿐은 아니다. 서양 ‘동백 아가씨’로 이름난 것이 춘희다. ‘춘’은 동백이란 뜻이니 춘희는 ‘동백 아가씨’. 춘희는 베르디의 3막짜리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오페라에서 폐병(객혈과 꽃 색깔의 일치가 신기하다)을 앓는 고급 창녀 비올레타가 좋아하는 꽃이 동백꽃이다. 오페라의 원작은 알렉상드르 뒤마의 연극 ‘동백 아가씨’(The Lady of Camillias).
사치와 허영 속에 살던 여인이 순진한 시골 청년을 사랑하게 되면서 재생을 꿈꾸나 때는 늦는다는 비극적 사랑이야기여서 인기가 대단하다.
이 이야기는 영화로도 여러 번 만들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그레타 가르보가 나온 ‘춘희’(Camille·1937·3월9일 하오 7시30분 상영). 조지 큐커가 감독하고 시골 청년 알프레도로는 로버트 테일러가 나오는 이 영화는 그레타 가르보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될 만큼 가르보의 신비하면서도 정열적인 성질에 딱 맞는 작품이다
"나는 백만명의 남자들에게 불성실한 여자"라고 말한 가르보는 철저히 과묵하고 사적인 스핑크스 같은 여인이었다. 쉰 듯 허스키한 목소리와 갈망하는 듯한 커다란 눈 그리고 큰 키에 어깨를 구부리고 어색한 자세를 지닌 설국에서 온 냉담한 미녀였다.
늘 멀리 떨어져 있는 의문부호 같았던 가르보의 걸작 14편이 3월1일부터 22일까지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 하오 7시30분부터 2편씩 카운티 뮤지엄 빙극장(5905 윌셔. 323-857-6010)에서 상영된다.
프로그램에는 님과 이별한 뒤 배를 타고 떠나는 가르보의 공허한 눈동자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크리스티나 여왕’(3월1일 ‘마타하리’와 동시상영)과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나오는 ‘그랜드호텔’(3월2일 ‘수전 레녹스’와 동시상영)이 포함돼 있다. 또 가르보의 첫 토키 ‘안나 크리스티’(3월9일)와 보기 드문 코미디 ‘니노치카’(3월22일 그녀의 마지막 영화 ‘두 얼굴의 여인’과 동시상영)도 선보인다.
이밖에도 가르보가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와 공연한 ‘육체와 악마’(3월8일 ‘키스’와 동시상영)와 ‘안나 카레니나’(3월16일 ‘사랑’과 동시상영)도 상영된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