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비가 내리고 가을이 깊어가니 브람스 음악이 좋을 계절이다. 기후 탓일까. 독일 북부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브람스의 음악은 어둡고 우수에 젖어 있다. 조락의 체념에 잠긴 선률 위에 황금빛으로 머무는 로맨티시즘을 그림으로 그려놓으면 브람스의 음악이 될 것이다.
혹자는 브람스의 음악을 과거에 집착, 클래식 형태에 호화로운 하모니와 리듬을 과적했다고 말하지만 낭만주의가 절정에 이르렀던 19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브람스로서는 시대의 성질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낭만과적파여서 브람스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데 지난 1997년 11월 브람스 사망 100주년을 맞아 로저 노링턴의 지휘로 LA필이 연주한 브람스 교향곡 전 4곡 공연에 참석했던 기쁜 경험이 있다.
낭만적인 것이란 자칫하면 절제를 상실할 수 있는 치명적 오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브람스는 더욱 고전적 형태에 매달렸다고 한다. 과묵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 정열적인 로맨틱한 개성과 고전 지향적 지성을 지녔던 사람인데 그의 음악은 고전주의 틀에 낭만적 정서를 담고 있다.
심각한 무드파였던 브람스는 오페라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종류의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4개의 교향곡이다. 그의 음악의 핵심일 뿐 아니라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대중들의 변치 않는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다. 브람스는 베토벤 콤플렉스 때문에 교향곡 작곡을 미뤄오다 43세가 되던 1876년에 가서야 제1번을 완성했다. 이 곡은 당대 최고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에 의해 ‘베토벤의 10번’이라 불릴 만큼 베토벤의 정신을 크게 담고 있다(14·17·18일 에마누엘 크리빈 지휘로 뮤직센터서 LA필이 연주한다).
브람스의 음악이 작품 속 계절과 장소 그리고 무드와 잘 어울리는 영화가 ‘이수’(Goodbye Again·1961·사진)다. 프랑솨즈 사강의 소설 ‘당신은 브람스를 좋아하십니까’가 원전인 중년 남녀와 청년의 삼각관계를 그린 로맨스영화다.
’이수’는 서울의 아카데미 극장에서 개봉됐었는데 당시 고교생이었던 나는 주연배우들인 잉그릿 버그만과 이브 몽탕 그리고 ‘사이코’로 기억이 생생한 앤소니 퍼킨스와 원작의 제목이 멋있어 보겠다고 벼르다가 놓치고 말았었다. 그런데 며칠전 고전영화 전문방영인 TCM을 트니 이 영화가 나왔다.
UA작으로 아나톨 리트박(잉그릿 버그만의 오스카 수상작 ‘추상’ 감독이 감독한 ‘이수’는 초가을 분위기의 파리가 무대(비가 내리고 주인공들이 코트를 입어 브람스 무드가 뭉클하다). 40세의 아름다운 실내장식가 폴라(잉그릿 버그만)에게는 멋진 신사 애인 로제(이브 몽탕)가 있지만 로제가 타고난 바람둥이여서 폴라는 고독과 시집을 못 가고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달린다.
이런 때 폴라 앞에 나타나는 남자가 폴라의 고객으로 부유한 미국인 부인의 25세난 아들 필립(앤소니 퍼킨스). 폴라는 자기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필립에게 점차 이끌리며 결국 둘이 동거하게 되나 자신이 필립을 사랑과 필요성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음을 깨닫고 이별을 선언한다.
"결국 나는 간주곡이었군. 이제 나는 어쩌지" 하며 계단을 뛰어내려가는 필립을 향해 폴라는 "이해해 줘, 나는 늙었단 말이야"라고 소리치며 통곡한다. 그리고 폴라와 로제는 결혼하나 로제의 바람기는 계속된다. 저녁약속을 못 지키겠다는 로제의 전화를 받은 폴라가 속옷바람으로 거울 앞에 앉아 크림화장을 하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울 만큼 고독해 보인다.
영화에서 필립은 폴라에게 "당신 브람스 좋아하세요"라고 물은 뒤 그녀를 브람스 교향곡 제3번 연주에 초청하며 사랑의 제스처를 보낸다. 이 교향곡의 제3악장(포코 알레그로토)의 느린 한숨처럼 멜랑콜리한 주제가 영화전편을 통해 연주되는데 이 주제는 실의에 빠져 혼자 위스키를 마시는 필립이 들른 재즈 바의 흑인 여가수(다이앤 캐롤)에 의해 재즈로 노래된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이지만 아무 의미도 없지요/사랑은 사람들이 노래하기 위한 말에 지나지 않지요/그것은 수많은 죄를 감추기 위한 말이랍니다" 그리움과 애수가 깃든 아름다운 멜로디가 풍성한 하모니에 싸여 "라 라 라, 라라라" 하며 흐르니 공연히 필립의 상심과 고독마저 전염돼 오는 듯 하다.
’이수’는 흑백으로 찍은 낭만적인 파리의 모습과 강렬한 연기 그리고 브람스의 음악이 있는 사랑의 영화로 가을에 잘 어울린다. 영화를 본 뒤 조지 셀의 지휘로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브람스의 교향곡 제3번을 틀었다(Sony Classical에서 전 4곡을 취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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