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시즌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해 온 클라우디오 아바도(68·사진)의 미주순회 마지막 연주회가 15일과 16일 이틀간 오렌지카운티 공연예술센터에서 열렸다. 다음 시즌부터는 영국의 사이몬 래틀이 아바도로부터 바톤을 이어 받게돼 이번 연주는 아바도의 베를린 필과의 고별연주인 셈이다.
베를린 필은 지난 3일 카네기홀의 올 겨울시즌을 열면서 미주 순회 길에 올랐었다. 뉴욕타임스가 인용한 프로그램 북에 따르면 베를린 필의 미주 순회연주는 9·11 테러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헌정하는 것이었다. 베를린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존 F. 케네디가 "이히 빈 베를리너"(나는 베를린 사람이다)라고 말했듯이 이 참담한 시기에 우리는 당신들과 함께 "우리는 모두 뉴요커들이다"고 말하고자 한다고 베를린 필은 피력했다. 그들은 상처받은 미국인들을 음악으로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첫날 첫 연주곡은 베토벤의 고향곡 제5번 ‘운명’이었다. 상처받고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야말로 베토벤의 음악이 필요할 때다. 특히 불가항력적인 것에 도전하는 ‘운명’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닉스의 재생을 경험케 해 지금 같은 때 매우 잘 어울리는 곡이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라디오에서 ‘운명’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요즘 고전음악 방송을 틀면 자주 ‘운명’이 연주되는 것은 이 곡이 불굴의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짧은 음 3개와 긴 음 1개의 모티브 ‘다 다 다 덤’("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라고 베토벤이 말했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으로 시작되는 ‘운명’은 모든 교향곡 중에서 가장 인기 있고 잘 알려진 것이다. 척 베리와 비틀즈는 ‘롤 오버 베토벤’이라는 노래에서 ‘운명’의 주제를 사용했고 피겨스케이팅 영화 ‘얼음 성’(Ice Castles)에서는 디스코로 편곡돼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또 이 4개의 음은 모스코드로 V자를 뜻해 2차대전 때 연합군의 승리를 뜻하는 암호로도 사용됐었다. 영화 ‘사상 최대의 작전’을 보면 히트곡 ‘다이애나’를 부른 폴 앵카가 미군 졸병으로 나와 노르망디 상륙작전서 전우에게 "다 다 다 덤" 하며 ‘운명’의 오프닝 모티브를 설명해 주는 장면이 있다.
베토벤이 고전주의의 전통을 깨고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계기가 된 ‘운명’의 모티브는 전 4악장을 통해 끊임없이 나오면서(특히 3악장 스케르조에서 혼들이 불어대는 모티브가 멋있다) 곡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다. 자유와 독립 그리고 이상과 민주적 정신을 사랑했던 베토벤의 성질을 잘 나타내는 ‘운명’은 추진력과 에너지 그리고 긴장감과 박력이 충만해 듣고 있으면 영혼이 불타오르는 감격을 맛보게 된다. 이 곡이 1808년 12월 비엔나에서 베토벤에 의해 초연된 이래 지금까지 끊임없이 연주되고 있는데도 신선감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숨가쁜 격정 때문이라고 하겠다.
최근 위암 치료로 무척 수척해진 모습으로 무대에 나선 아바도는 엄격하면서도 아름다운 통제력으로 베를린 필을 지휘, 무성하니 깊고 짙은 ‘운명’을 들려주었다. 그의 왼손은 유연히 공간을 유영하며 숨이 막히도록 힘차고 원숙한 음들을 이끌어냈는데 마치 발레를 하듯 우아하고 품위 있는 제스처였다. 마지막 음을 끌어내는 고상하면서도 결단력 있는 손의 제스처와 함께 만당을 이룬 청중들은 기립박수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베를린 필은 풍성한 현악기와 위풍당당한 금관악기 그리고 높고 명료한 목관악기로 사랑을 받고 있는데 ‘운명’에 이어 후반부를 장식한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은 목가적인 아름다움과 상쾌함으로 가득 찼다.
이 서정적인 음악은 1807년 여름 베토벤이 비엔나 인근 여름 휴양지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작곡했다. 아벨 강스가 감독한 프랑스 영화 ‘베토벤의 삶과 사랑’(The Life and Loves of Beethoven·1937)을 보면 청각장애에 시달리는 베토벤이 새소리와 종소리, 대장간소리와 폭포소리 그리고 폭우소리 속에서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비를 피해 나무 밑에 앉아 오선지에 ‘전원’ 교향곡을 작곡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있다. 20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때 느낀 감격을 지금도 갖고 있다.
앙코르는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 민주적 메시지가 담긴 우렁찬 곡이어서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주는 음악이다. 영광스러운 저녁이었다. 올 베토벤이 남겨준 감동을 안고 돌아오면서 아바도의 건강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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