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나면 죽어나는 건 힘없고 백 없는 백성들이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보복 공격하면서 늘어만가는 피난민들이 미제 구호품 앞에 장사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나의 6.25 피난시절이 생각나 감회가 새롭다.
6.25가 터지면서 우리 가족은 우물쭈물 하다가 제때 피난을 못 가고 1.4후퇴가 돼서야 미군 스리쿼터를 타고 부산으로 피난 갔다. 정착한 곳이 범일동이었다.
또래 부산 꼬마들로부터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고 놀림을 받으면서 보낸 피난생활이 근 5년. 지금 생각하니 송도, 영도다리, 용두산, 광복동, 서면, 동래온천 그리고 내가 처음 영화(무성영화)를 보기 시작한 3.1극장 등이 옛 영화 속 장면처럼 떠오른다.
전쟁마저도 로맨틱하게 느껴지던 소년시절을 타향에서 보낸 나는 그래서 지금도 부산하면 애증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때는 "부산×들 서울에 올라오기만 해봐라" 하고 별렀었지만 막상 커서 대학생이 돼서는 경상도 출신의 동기생들과 막걸리에 취해 인생과 문학토론을 하곤 했다. 모든 것은 지나가면 잊혀지는 법.
내가 부산 피난시절 맛있게 먹었던 것이 요즘 LA에서도 인기 있는 부대찌개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부대찌개의 원조인 꿀꿀이죽이다. 꿀꿀이죽은 미군부대서 먹다 남은 온갖 음식 찌꺼기들을 받아다 큰솥에 넣고 끓여 만든 한국식 스튜다. 꿀꿀이죽이란 말처럼 돼지나 먹을 것이었지만 굶주린 피난민들에겐 그것이야말로 미제 진수성찬이었다.
당시 우리 집 앞에는 노천시장이 있었다. 거기서 아주머니들은 시커먼 솥에다 꿀꿀이죽을 끓여 팔았는데 나는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에 끌려 이틀이 멀다하고 솥 주변을 서성이거나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입맛을 다시곤 했었다. 어쩌다 어머니가 돈을 주면 꿀꿀이죽을 사먹곤 했는데 아주머니가 퍼주는 죽 속에 플럼이나 왕건이 고깃덩어리라도 들어가면 먹기도 전에 만복감을 느꼈었다. 그때의 내 행복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와 미국과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던가 보다. G.I.가 주는 검과 초컬릿 그리고 꿀꿀이죽을 먹고 할리웃 영화를 보면서 큰 내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슈샤인’에 나오는 전후 이탈리아 아이들의 삶과 비슷하다) 인생황혼 초엽에 미국에서 살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때로 이거 내가 절반은 미제가 아닌가 하고 괘념케 될 때가 있다.
얼마전 신문을 보니 경기도 파주와 동두천 일대의 미군부대서 나온 잔반을 부대찌개 재료로 공급하고 또 만들어 판 사람들이 구속됐다는 뉴스가 실렸다. 나는 이 뉴스를 보면서 내가 먹던 꿀꿀이죽이 생각나 며칠 전에는 코리아타운 내 전주 한일관에 가서 옛 생각을 하며 부대찌개를 시켜 먹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어떤 층이 주로 부대찌개를 찾느냐고 물었더니 젊은 층이 소시지와 라면 맛에 잘 찾는다고 일러준다. 6.25를 모를 우리 젊은 세대가 당시 그들의 인생 선배들이 먹던 꿀꿀이죽에서 개발된 부대찌개를 즐긴다는 데서 나는 뿌리깊은 비극적 한국 음식사의 한 페이지를 들춰보는 기분마저 들었다.
못살아서 그랬는지 한 때 우리나라는 불량식품 팔아먹기로 유명했다. 대학생 때 마시던 싸구려 막걸리에는 발효촉진용 카바이트 성분이 섞여 마시고 난 이튿날이면 뱃속에서 막걸리가 뒤늦게 발효하는 소리가 요란했었다.
또 우리는 그때 눈까지 멀게 할 수도 있는 화학물질을 섞은 막소주도 거침없이 마시며 고성방가 했었다. 그리고 심지어 워커 가죽을 쇠고기라고 속여 설렁탕을 만들어 팔아먹기도 했다. 이것을 수구레국이라고 일컫는다.
그때는 가난해서 그랬다고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아직도 미군 잔반을 부대찌개 재료로 속여 판단 말인가. 불량식품의 전통도 한국 정치판 꼴불견처럼 유구하구나.
꿀꿀이죽이 아직도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 요즘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의 굶주림과 오버랩 되면서 그 모든 것의 원인인 전쟁이라는 인류 불치의 병이 가진 무자비한 생존력에 전율하게 된다. 인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간은 참으로 사악한 존재임에 분명하다.
피난민들의 꼴이란 6.25 때나 지금이나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구호품(우리는 구제품이라 불렀다)을 받으려고 줄 서 있는 아프간 난민들 모습을 보니 6.25 때 우리 모습이 떠올라 공연히 심기가 뒤틀리고 반미감정마저 생긴다.
이제 아프간 난민 어린이들은 옛날의 나처럼 미제 꿀꿀이죽을 먹을 것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슈펭글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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