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머리에 아직도 앳된 모습을 지닌 19세짜리 중국계 피아니스트 랑 랑(사진)의 쇼팽 연주는 확실히 하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제스처만 변화무쌍한 것이 아니라 그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해석한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E단조)은 이 음악이 갖고 있는 하모니와 멜로디와 장식음들의 세세한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재창조해 낸 것이었다.
쇼팽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은 폭발적인 것에서부터 내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표현을 해낼 수 있는 로맨틱한 악기인 피아노의 성질을 극대화시킨 작품으로 가장 아름다운 협주곡 중의 하나다. 깊고 표현력 풍부하고 다양한 장식으로 꾸며졌는데 무엇보다 서정적이다.
몹시 수줍고 사사로운 개성을 지닌 피아노의 시인 쇼팽이 피아노를 오케스트라보다 으뜸으로 삼고 지은 곡이어서 피아노가 지닌 열정에서부터 부드러움까지를 고루 즐길 수 있다. 섬세한가 하면 역동적이고 민감한가 하면 웅장한데 랑 랑은 이날 뛰어난 리듬 감각과 조물주 같은 솜씨로 멜로디를 불러내고 다루면서 완벽한 스타일로 쇼팽을 연주했다.
강렬한 때는 성난 활화산 같고 섬세할 때는 여인이 비단 짜 듯한데 그의 손가락들은 건반 위에서 노도처럼 질주하고 가볍게 달리고 또 산보하고 만유하면서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 주었다. 음 안에 가두어진 느낌이었다.
많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보았지만 랑 랑처럼 제스처가 요란한 사람은 처음 봤다. 마치 피아니스트 역을 맡은 배우가 때로 오버액팅을 하는 것 같아 음악을 충분히 감상하는데 다소 방해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으로 열변적이며 아울러 무언적이었다. 대성할 연주자다.
랑 랑은 1999년 10월 시카고의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순간에 안드레 와츠를 대신해 무대에 오르면서 세계 음악현장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때 시카고 트리뷴은 “오랜만에 만나는 가장 크고 흥분시키는 건반의 재능인 중 하나”라고 격찬했다.
랑 랑의 쇼팽 연주는 지난 22일 UCLA 루이스 홀에서 열린 LA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제33회 시즌오프닝 레퍼토리의 하나였다. 이날 레퍼토리는 당초 발표된 것과 대폭 교체돼 연주됐다. 상임 지휘자 제프리 카헤인은 테러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당초 선정한 볼콤과 바스크스 및 하이든 대신 바버와 베토벤의 것으로 교체했다.
연주회는 카헤인과 랑 랑이 함께 피아노로 연주한 미국 국가로 시작됐다. 이어 첫 연주곡은 새뮤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비극적 아름다움이 가득한 곡으로 영화 ‘플래툰’에서도 극적으로 사용됐다.
바버의 곡이 끝난 후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카헤인은 피아노로 ‘아메리칸 더 뷰티플’을 탄식하듯 연주했는데 카헤인은 미국의 비극에 심히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숙연한 분위기는 랑 랑이 청중들의 열화 같은 기립박수에 대한 앙코르로 수자의 행진곡 ‘성조기여 영원하라’를 신나게 연주하자 청중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고 폭소를 터뜨리면서 원기 왕성한 분위기로 돌아섰다. 랑 랑은 마치 레이 찰스처럼 온몸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 피아노가 깨져라 쳐대 장내는 흥분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마지막 곡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 ‘영웅’. 베토벤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창한 나폴레옹에게 바치기로 했다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것에 분개해 표지를 찢어버린 ‘영웅’ 교향곡은 장렬하고 영웅적이며 또 인간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어서 테러로 의기소침해 있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고양시키기엔 아주 알맞은 음악이다. 또 이 교향곡의 제2악장이 장송행진곡이라는 것도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분위기와 어울렸다. 이날 연주된 곡들은 10월7일 하오 8시 KMZT(105.1 FM)에서 방송한다. 랑 랑의 연주를 한번 들어보기를 권한다.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정규 오케스트라의 절반 정도 단원들로 구성된 소규모의 교항악단으로 LA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곱슬머리에 키가 매우 작은 제프리 카헤인이 5년 전부터 바톤을 잡은 이후 미국 내 유수의 오케스트라로 성장시켰다. 그의 이같은 업적이 인정받아 LA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카네기홀의 초청으로 내년 4월26일과 27일 뉴욕 무대에 선다. LA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카네기홀 연주는 1980년 이후 처음 있는 일.
LA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내년 2월을 제외하고 5월까지 매달 2회(토요일은 글렌데일 알렉스 극장, 일요일은 로이스홀) 같은 레퍼토리를 연주한다. 이번 시즌 특기할 만한 것은 12월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카헤인이 연주하는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전5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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