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구 을지로 ‘실비바 파도’의 김현기 대표. [장준우 제공]
외식업 현장은 치열하다. 특히 사람과 자본이 몰려 있는 서울의 을지로, 성수동, 압구정, 한남동은 격전지 중의 격전지다. 수많은 식당이 생겨났다 없어지는 게 예삿일이다. 이 살벌한 경쟁 속에서도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내는 곳이 있다. 을지로의 '실비바 파도'가 그중 한곳이다. 을지로3가 골목 한편 2층에 자리 잡은 이곳은 오래된 포장마차 분위기가 물씬하다. 김지애의 '몰래한 사랑',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 구창모의 '희나리' 등 1970~1990년대 노래들이 열 평 남짓한 공간을 채운다. 언뜻 보면 흔한 복고 감성이나 '한식 뉴트로'의 전형 같아 보이지만 콘텐츠는 남다르다.
‘실비바 파도'는 당일 잡은 해산물을 뜻하는 ‘당일바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운다. 대표가 직접 경남 마산(창원)까지 내려가 당일 어시장 해산물을 올리고, 막장과 깻잎을 곁들인 제철 생선으로 상차림을 한다. 지방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진짜 한국 음식의 결을 서울 한복판에 고집스럽게 옮겨왔다. 묘한 매력의 공간을 만들어낸 이가 궁금했다. 서울과 마산을 오가며 해산물을 공수하는 김현기 대표를 마산 공동어시장에서 만났다.
김 대표의 경력은 전혀 외식업과 닿아 있지 않았다. 상경계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초반 갑작스럽게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처음엔 파킨슨 진단을 받았어요. 나중에 오진으로 밝혀졌지만 그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죠. 도저히 출근이 안 되더라고요."
퇴사 후 못 해본 걸 해보자는 생각에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일본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 년 중 반 이상 일본에 머무르며 음식과 식문화에 몰두했다. 특히 오사카의 서서 마시는 술집, 다치노미야의 매력에 빠졌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실비바 파도의 전신인 ‘스탠딩바 전기'다.
“그땐 서울에서 일식 먹을 데가 마땅치 않았어요. 일본은 그냥 서서 먹는 소바집도 진짜 맛있잖아요. 서울에선 잘하는 집을 가도 이상하게 그 느낌이 안 나더군요." 그가 바랐던 건 단순한 요리의 복제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파는 외국 음식이 현지에서 먹었던 맛과 다른 이유는 음식 때문만이 아니에요. 주변 공기, 손님들 표정, 대화, 분위기, 그 모든 게 맛을 만들어주는 거죠."
그는 2009년 ‘의자가 없는 술집', ‘칸막이 없는 구조', ‘작은 접시로 나오는 음식'이라는 세 가지 원칙으로 ‘스탠딩바 전기'를 오픈했다. 일본을 자주 가본 MZ세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었다. 성업과는 별개로 김 대표는 메뉴판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 메뉴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깨달은 건 ‘로컬'이 없다는 거였어요. 유럽이나 일본의 고급 식당은 항상 지역명을 붙이잖아요. 근데 우린 그게 없었죠. 가장 로컬적인 게 가장 경쟁력이 있는데 말이에요."
■ 지역성 담은 '하루짜리 맛'팬데믹 시기, 가게 리뉴얼을 고민하며 그는 혼자 남해안을 돌아다녔다. 전라도부터 시작해 어시장과 백반집을 찾아다니며 지방의 참맛을 찾아 헤맸다. 그러다 우연히 마산을 발견했다. “서울 사람들은 남해안 하면 여수나 통영만 생각하는데, 마산은 아직 관광지가 아니라 거품이 없어요. 그런데 지역성은 되게 강하고 물건(식재료) 질은 정말 좋거든요."
가격 대비 해산물의 퀄리티가 좋고 KTX로 서울과 연결된다는 점에서 마산은 그가 찾던 최적의 지역이었다. 김 대표는 마산에 한 달 반 이상 어시장 인근 모텔에 머물며 새벽마다 어시장에 나가 물건을 보고, 중매인을 통해 경매에 간접 참여하면서 직접 유통 구조를 파악하고 신뢰를 쌓아갔다.
김 대표가 생각하는 음식의 핵심은 ‘하루짜리 맛'이다. 시간 단위로 변하는 해산물의 선도 차이를 누가 알까 싶지만, 그 작은 차이를 위해 몸이 고단해지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리 서울에서 좋은 생선을 가져다 써도 산지와 비교하면 물리적 시간의 차이는 극복하기 힘들죠."
처음에는 혼자서 스티로폼 박스를 들고 버스터미널까지 가져왔지만, 이제는 중매인, 상인, 운송업자 간의 나름의 네트워크를 직접 구축했다. 새벽에 좋은 물건이 보이면 퀵으로 버스터미널까지 보내고, 다시 서울에서 퀵으로 받는 방식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2023년 ‘스탠딩바 전기'는 ‘마산 당일바리'를 내세운 ‘실비바 파도'로 변모했다.
마산에서 물건을 올리는 게 김 대표의 몫이라면, 신선한 해산물이 올라올 때마다 손질하고 요리를 만들어내는 건 요리사의 몫이다. 김 대표는 스스로 요리사라고 하지 않지만 기본적인 요리를 다 해낼 정도로 독학으로 요리를 연구했다. 이를 바탕으로 셰프들과의 협업을 통해 메뉴를 만들어낸다. “대표라도 기본적으로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봐요. 무작정 이 재료를 가지고 이렇게 하라고 하기보다는 셰프들에게 제가 원하는 방향을 보여주고 제안하죠."
■ 한식을 다 안다고 생각하죠?“저도 그랬지만 한국 사람이 한국 음식을 제일 몰라요."
일본의 맛에 빠져 일본식 선술집을 운영하다 뒤늦게 한국의 맛을 발견한 김 대표. 많은 사람들이 인천에 가면 밴댕이를 먹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군산엔 짬뽕 말고도 맛있는 게 훨씬 많다는 걸 체감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안타까워한다.
“한식의 미덕은 지방에 있어요. 지방이야말로 한국 음식의 정수죠." 그는 요리사일수록 지방에 내려가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많은 요리사들, 특히 한식 하는 사람들일수록 지방에 뭐가 있는지 정말 몰라요. 늘 하던 재료만 쓰고, 늘 하던 방식만 하죠. 계절마다 나오는 해산물도 끝도 없어요. 용치놀래기, 홍감펭, 미더덕, 돌장어…. 이런 건 지방에서밖에 볼 수가 없어요."
김 대표가 말하는 ‘진짜 한식'은 고급화된 다이닝 코스나 서울식 감성 한식이 아니다. 진한 고등어조림, 무심하게 무친 나물, 막장과 함께 깻잎에 싸먹는 회 한 점. 일상에서 먹는 음식들이 진짜 한식이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안다고 착각하며 모르는 지방의 숨겨진 맛들이 많이 있어요. 그걸 외식업자들이, 요리사들이 더 많이 알리고 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야 한국 음식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셰프란 말이 요리사란 말과 동의어가 된 요즘이지만, 그 어원은 지휘자, 대표, 마스터, 수장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재료의 선택부터 최종 고객 경험까지 섬세하게 지휘하는 그를 셰프라고 부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깻잎부터 시계 방향으로 진동산 미더덕회, 당일바리 3종 회(숭어, 도다리, 놀래미), 마산식 쌈장, 통영산 삼배채굴. [장준우 제공]

서울 중구 을지로에 위치한 ‘실비바 파도’의 외관. 간판에 마산, 통영의 당일바리 수산물로 요리한다고 적혀 있다. [장준우 제공]

김현기 ‘실비바 파도’ 대표가 경남 마산어시장에서 당일 식당에서 요리할 수산물을 고르고 있다. [장준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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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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