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추억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20여년 전, 해리 포터라는 한 마법사 소년에게 빠졌던 그 시절의 풍경들이다.
킹스 크로스 역 9와 3/4 승강장을 통과해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들어가면 그리핀도르 기숙사에서 온갖 시험과 난관을 통과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해리와 론과 헤르미온느가 있었다. 이마에 번개모양 흉터를 가진 ‘살아남은 아이’는 퀴디치 시합의 영웅이 되고, 어둠의 마법사 볼드모트와 대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성장해간다.
아바다 케다브라, 스투페파이,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같은 마법주문이 횡행하는 가운데 호그와트의 비밀지도, 투명망토, 딱총나무지팡이에 가슴 뛰었던 시절… 디멘터들이 지키는 참혹한 아즈카반 감옥에서 12년이나 견딘 시리우스 블랙의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싫을 만큼 힘들었고, 엄격하지만 자상한 맥고나걸 교수와 덤블도어 교장, 못돼 처먹은 엄브리지 교수, 끝까지 모두를 의심하게 했던 스네이프 교수 등 수많은 인물들은 환상을 사실처럼 착각하게 만든 마법의 창조물이었다.
영국 작가 J.K. 롤링이 1997년부터 10년 동안 쓴 해리포터 시리즈는 전 세계적으로 특별한 사회현상을 일으킨 소설이다. 200여개국에서 80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5억 부 이상(2010년 기준) 팔렸는데 이는 역사상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기록이다. 처음에는 아동판타지 소설로 분류되었지만 어린 독자들뿐만 아니라 성인들까지 매혹되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열광한 최초의 소설이 되었다.
한창 연재 중이던 시기에는 다음 편 소설이 나올 때마다 큰 난리가 벌어졌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4편인지 5편인지 나오던 날, 열 살 아들의 성화로 반스앤노블스 서점 앞에 줄을 서서 자정이 되기를 기다렸던 추억이다. 그때는 피곤하고 귀찮았지만 돌이켜보면 아름답고 소중한 시간들, 그때의 통통한 아들 얼굴과 함께 영원히 박제된 아련한 장면이다.
그리고 그때 사온 책을 읽느라 끙끙댔던 기억, 한국에서 번역판이 나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했으니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원서’ 읽기에 도전했던 것이다. 아들은 하루 이틀 만에 다 읽어치운 책을 한달 넘게 붙들고 씨름하여 완독했는데 나중에 번역판을 읽으니 뭔가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는 고백도 해야겠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시작으로 총 7권의 시리즈는 마지막 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로 막을 내렸다. 볼드모트와 어둠의 세력이 멸절되고 평온이 찾아온 마법세계에서 해리 포터와 지니 위즐리는 세 아들을 낳고 호그와트의 학부모가 되어있다.
그리고 그렇게 19년이 지난 시점의 이야기가 얼마 전 연극으로 나왔다. 지금 할리웃의 팬테이지스 극장(Pantages Theatre)에서 공연 중인 ‘해리 포터와 저주받은 아이’(Harry Potter and the Cursed Child)가 그것이다.
지난 2월 개막돼 6월22일까지 계속되는 이 연극은 해리포터 시리즈의 8편에 해당한다. 원작자 J.K. 롤링과 존 티파니, 잭 손이 공동 집필하여 2016년 7월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후 미국 브로드웨이, 호주 멜버른, 함부르크, 토론토, 도쿄를 거쳐 올 초부터 LA를 시작으로 미 도시들을 순회 중이다.
연극은 중년이 된 해리와 지니, 론과 헤르미온느 부부가 킹스 크로스 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호그와트 급행열차를 타는 자녀들을 배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저주받은 아이’는 해리의 둘째아들 세베루스 알버스 포터, 너무도 유명한 아버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그는 처음 탄 열차에서 드레이프 말포이의 아들 스코피어스 말포이와 친구가 되고, 기숙사 배정에서는 당연히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던 그리핀도르가 아니라 슬리데린으로 낙착된다.
그리고 볼드모트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는 스코피어스와 찐 우정을 나누는 가운데 과거 안타까운 죽임을 당했던 케드릭 디고리의 아버지가 찾아와 시간여행 장치를 사용해 케드릭을 되살려달라고 부탁하자 알버스와 스코피어스는 함께 시간여행의 모험들을 펼치게 된다.
오랜만에 아들과 함께 큰 기대를 안고 극장에 들어섰으나 공연을 충분히 즐기지는 못했다. 일단 연극이 너무 길고 내용도 복잡했다. 알고 보니 원래 1부와 2부로 나뉘어 제작된 연극을 나중에 하나로 합치면서 불가피하게 늘어졌다고 한다. 또 작품 자체는 로렌스 올리비에상과 토니상 등을 휩쓸며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팬들의 반응은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다. 헤르미온느가 흑인이라는 설정, 나중에 등장하는 동성애 코드가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았고 각종 마법이 매끄럽게 연출되어 몇몇 장면에서는 깜짝 놀라게 되는 등 특수효과와 세트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무엇보다 20년 전의 젊은 내가 소환되어 그때의 흥분과 노스탤지어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이 관객이 많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청장년 심지어 중노년 층이 훨씬 많았다. 요즘 아이들은 해리 포터를 많이 읽지 않는 것일까? 해리 포터가 나온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니 믿을 수가 없다.
<
정숙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