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짧게 나파 밸리 여행을 다녀왔다. 와이너리 여행은 새싹 트는 봄, 포도가 익어가는 여름, 풍성한 수확기의 가을도 좋지만, 헐벗은 가지들이 끝없는 열병식을 벌이는 겨울이야말로 호젓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한차례 생육의 사이클을 돌고 난 포도나무들이 휴식하는 계절, 이파리 없는 나무들에서 피어나는 흙냄새가 땅과 생명의 에너지를 느끼게 한다.
이번에 방문한 곳은 ‘셰이퍼 빈야즈’(Shafer Vineyards). 3년전 한국의 신세계가 인수해 한인들의 관심이 높아진 나파 밸리의 명품 와이너리다. 이곳은 개인적으로 2016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신세계의 매입 후 달라진 점이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찾았다.
1972년 설립된 셰이퍼는 나파 밸리의 황금지역 스택스 립(Stags Leap)의 터줏대감이다. 와인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나파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수퍼스타 와이너리의 하나”라고 평한 바 있는 이곳은 대표와인 ‘힐사이드 셀렉트’(Hillside Select)가 최상급 카버네 소비뇽의 하나로 꼽히며 오랜 세월 흔들림 없는 명성을 유지해왔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성취가 단지 세 사람, 창립자 존 셰이퍼와 아들 더그 셰이퍼, 와인메이커 일라이아스 페르난데즈의 기막힌 호흡과 일체감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특히 페르난데즈는 40년 넘게 이곳에서만 일한 전설적인 와인메이커로, 부침 많은 와인업계에서는 굉장히 드문 일이며 일관성 있는 셰이퍼 와인을 만들어온 원동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2019년 창립자의 타계 후 와이너리의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던 더그와 페르난데즈는 신세계의 정용진 회장을 만나면서 2022년 셰이퍼를 2억5,000만 달러에 매각하는 도약을 택했다. 마침 정 회장은 2008년 신세계와인컴퍼니를 설립하고 와인사업에 뛰어든 후 좋은 매물을 찾던 중이었는데 운 좋게 운영철학이 일치하는 프리미엄 와이너리를 만나 전격인수하게 된 것이다.
양측이 가장 중요시하는 경영철학은 첫째도 퀄리티, 둘째도 퀄리티, 셋째도 퀄리티다. 무리하게 확장하지 않고 소규모로 최상급 와인을 생산하면서 명성을 지킨다는 방침이다. 따라서 소유주는 바뀌었지만 경영진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직원 중에 한국인은 한 명도 없는 것 같았다. 업계에서는 와이너리 매매가 잦은 나파에서 새 소유주가 양조와 경영에 일절 참여하지 않는 유일한 사례라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그러면 신세계의 인수 3년 동안 셰이퍼는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8년전 방문했을 때, 셰이퍼는 비슷한 급의 다른 와이너리들에 비해 소박한 곳이었다. 와이너리 건축물, 양조시설, 정원 모두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테이스팅 룸 역시 와인을 마시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을 갖춘 겉치레 없는 분위기가 신선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의 럭서리 브랜드 대기업이 인수했으니 좀더 고급스러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안고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신선한 충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이퍼는 거의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입구서부터 건물도, 정원도, 포도밭도, 테이스팅 룸도 그대로였다. 물론 기본 시음료는 55달러에서 125달러로 두 배 이상 비싸졌지만 그건 지난 10년 동안 나파의 모든 와이너리들이 말도 안 되게 올린 데 비하면 놀랄 일도 아니다. 그리고 시음 경험으로 따지면 그만큼 흡족하기도 어려울 만큼 모든 와인이 맛있고 특별했다.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와이너리 관계자와 몇몇 미디어에 의하면 그동안 셰이퍼는 포도밭을 더 사들였고, 생산량도 조금 늘렸다. 2022년 바로 옆의 황금싸라기 포도밭 9헥타르를 3,500만 달러에 매입했고, 다음해에는 나파 핵심지역인 아틀라스 피크의 빈야드 4헥타르를 사들여 전체 포트폴리오를 250에이커로 확장했다. 와인 생산량도 연간 3만~3만5,000 케이스에서 4만 케이스로 늘었고, 최근에는 미 동부와 북서부의 유통업체와 새 계약을 맺는 등 보급도 늘려가고 있다. 해외수출은 신세계 전이나 후나 한국이 1위 수출국, 이어 캐나다와 영국 순이라고 한다.
현지 직원에 따르면 신세계 매입 후 한국인 방문객이 조금 늘긴 했으나 특별히 많아지진 않았다. 가끔 예약 없이 호기심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음은 못하지만 포도밭을 둘러보고 와인을 사가기도 한다고 한다.
셰이퍼는 샤도네, 시라, 카버네 소비뇽 등 5종의 와인을 생산한다. 경사진 언덕에서 자란 100% 최상급 카버네 소비뇽 ‘힐사이드 셀렉트’는 소량 생산해 멤버들에게만 판매한다. 시라 블렌드인 ‘릴렌트리스’는 ‘와인 스펙테이터’가 2012년 ‘올해의 와인’으로 선정한 와인으로 이번 테이스팅에서도 정말 맛있었다. 모든 와인은 100%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하며 오크통은 늘 새것을 사용할 만큼 퀄리티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지금 나파 밸리에는 한국의 재벌오너들이 운영하는 와이너리가 3개로 늘었다. 이희상 전 동아원그룹 회장이 세운 ‘다나 에스테이트’와 한화가 사들인 ‘세븐 스톤즈’까지 모두 최고급 와인 생산자들이다. 와이너리는 돈을 많이 버는 사업이 아니다. 이미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신분과 위상과 격을 높이기 위해 뛰어든다. 나파에서 펼치는 이들의 새로운 게임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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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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