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구’는 한국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낚시터다. 엘에이 폭동, ‘사이구’의 충격이 생생하던 시절에 이민 와서 들었던 지명이라 일찌감치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때는 낚시를 몰랐는데도.
포토맥 강이 체사픽 만을 만나는 남부 메릴랜드의 지방도로 번호다. 249. 간선도로 5번에서 가지 쳐서 섬에서 끝난다. 그 섬으로 넘어가는 다리 초입에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지명으로는 파이니 포인트(Piney Point).
워싱턴에서 적당한 거리에, 입장료 내는 공원도 아니고, 오픈 시간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니 좀체 쉴 날 내기 어려웠던 초기 이민자들에게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런 만큼 이사구에서 낚시하러 온 한국분들을 만나는 건 특별할 게 없는데, ‘크랩 킴’ 선생과의 만남은 달랐다. 집으로 돌아가던 김 선생은 평일이라 사람 드문 시간에 오렌지 상의의 여인이 눈에 들어왔고, 원투 낚시의 정석 포즈로 날리는 비거리가 예사롭지 않아 차를 세웠다고 한다. 궁금해서. 한국분이세요? 혹시 운동하셨어요? 마침 올림픽 기간이다.
입질 받지 않아 지루하던 차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다리 건너에 있는 자기 집 도크에서 한번 던져보시라고 초대를 하신다. 그렇게 주소를 받고 통성명 하기를 게장사 하는 김씨, 크랩 김이라고 주변에서 부른다고 했다.
그렇다고 초면에 지나가는 인삿말을 덥석 물자니… 평소 우리는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하지만 내내 허탕친 손맛을 한번은 보고 싶다는 욕심이 무섭다. 다리 너머 세인트 조지 섬이 궁금하기도 했다. 끄트머리에 있다는 방갈로와 캠프장에 예약해서 하루종일 낚시만 해볼까 알아보던 차이기도 했고.
가볼까, 에이 하는 말이지 어떻게 그러냐, 왜 오라시잖아, 그래도 어떻게 알고, 가서 집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라도 오자… 집 뒤가 바다여서 아침에 조기 잡아 아점에 매운탕 끓여먹는 집에 살아보는 게 꿈인 여자가 이겼다.
다리를 건너가니 풍경이 확 달라진다. 고급주택과 낡고 오래된 집들이 교차한다. 섬은 크지 않아 네비의 안내로 곧 김 선생 댁을 찾았다. 이사구에서 본 붉은 글씨로 CRAB이라고 쓴 작은 트럭이 주차되어 있으니 맞다. 주차하고 미적거리고 있으니 김 선생이 안에서 나와 반긴다.
집 뒤편으로 게틀이 쌓여 있고 긴 도크에는 게잡이 배가 정박되어 있다. 이사구에서는 바람에 파도로 물이 거칠었는데 여기는 잠잠하다. 만처럼 파인 그 앞을 가르는 제방이 쌓여 있어 물살을 막고 있다는 설명이다.
게잡이는 은퇴후 부업이라 혼자 하신다고 한다. 사람 쓸 만한 벌이까지는 욕심 없고, 골치도 없고, 고정납품처로 거래해 온 몇몇 한국식품점에 꾸준히 물량 대는 걸로 충분하다고.
배 안의 상자에서 허물 벗는 중인 필러 크랩을 꺼내 툭툭 잘라 미끼 써보라고 권한다. 블러드 웜보다도 비싸 우리는 한번도 사본 적이 없다.
미끼 좋고 물 좋아서인지 입질이 번개다. 손바닥보다 큰 스팟에, 꿈틀꿈틀 장어에, 팔뚝만한 레드 드럼까지 건져대는, 소싯적 투포환 선수 했을 것 같은 여인은 완전 환상특급이다.
뒤돌아볼 생각 없는 아내를 홀로 두고 김 선생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살았나, 지금 뭐 하나, 누구 아시냐, 그런 얘기. 이민 연조는 비슷한데 직장일만 해온 우리와는 달리 김 선생 부부는 일찌감치 시작한 리쿼스토어를 오래 하다가 얼마 전에 정리했다고 한다. 주 7일, 갇힌 세월. 이제 시간이 생긴 부인께서는 수요 저녁예배를 가서 뵙지 못 했다. 강도 맞은 얘기는 단편 영화 같아 나중에 정리하고 싶을 정도였다.
어둠이 깔리도록 원 없이 손맛을 본 아내, 그래도 미련이 남은 듯 했으나 언제든지 오셔서 노시라는 말씀에 대를 접었다. 디디가 걱정에 불안해 할 시간.
인사 하고 나오는데 또 잡으신다. 고기 좀 가져가시라고. 못 이기는 척 차고의 작업장에 따라 들어갔다. 게틀에 미끼로 넣는다는 냉동 전어가 키높이 냉동고를 꽉 채우고 있었다.
한쪽 벽에 놓인 업소용 냉동고의 문짝을 위로 제쳐 보이셨다. 큰 고기들이 꽝꽝 얼어 있는 상자 한 짝을 들어내신다. 극구 말렸다. 우리 둘이 그렇게 못 먹어요. 그렇게 실랑이를 해서 큰 종이봉투 두 개를 받았다. 양도 양이지만 하나 같이 바닷가에서 깔짝대는 우리로서는 면접도 못할 대물들이다.
길을 가다가 건너편에 동양인 눈에 띄면 건너가서 한국분이냐 묻던, 귀한 고춧가루 생기면 양배추 김치 담궈 이웃들과 나누던 이민 초기, 나도 말로만 듣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하루였다.
돌아오는 두 시간의 운전 내내 캡틴 킴의 뒷마당을 복기했다. 내일도 가고 모래도 가고 개학하면 주말마다 찾아가고 싶지만 그러면 인간이 너무 없어 보이잖나. 오늘은 어쩔 수 없어 빈손으로 가서 두 손 가득 받아만 왔으니 제대로 정성 담아 다음에 인사 가야겠다. 제때 물때 맞춰.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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