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리 가격 급등이 호재인 이유
▶ 반도체·디스플레이·철강·석유화학 등 한국 주요 수출 품목 ‘원자재’적 특징
▶수요 위축 때는 생산량 줄이기 어렵고 활황에도 수출이 바로 증가하진 않아
▶끊임없는 변동성 노출되지 않으려면 기술·자본·경영 노하우 축적 절실하지만 한국 기업, 세계적 기업들에 비해 약해
▶구리 등 수출 선행지표 점검에 힘써야
세계 최대의 노천 구리광산인 칠레 추키카마타에서 관광객들이 구리 원석을 줍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근 구리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17일 영국 런던 금속거래소에서 구리 1파운드 가격이 5.08달러를 넘어서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구리가격 상승이 무슨 대수냐고 질문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우리나라 수출이 구리 값에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소식이다. 이 문제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아래의 <그림>은 한국의 수출 증가율과 구리 가격의 관계를 보여준다. 구리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서면 한국 수출이 개선되며, 반대로 구리가격이 급락할 때에는 한국 수출이 큰 폭으로 감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구리가 ‘구리박사’라는 애칭을 들을 정도로 경제 상황을 잘 예측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리는 가정과 공장, 그리고 전력 등 경제 대부분의 분야에 널리 사용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시작된 반도체 혁명 속에서 각종 기계가 가전제품화되고 있다는 점도 구리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요인이다. 물론 은이 전도성 면에서는 더 낫지만, 구리 값이 워낙 싸기 때문에 구리는 앞으로도 ‘구리 박사’라는 명칭에 맞는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이 높다.
구리가격의 변화가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이유는 수출 제품의 상당수가 ‘원자재’로서의 특성을 지니는 데 있다. 디스플레이나 반도체 철강 그리고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데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며, 오랜 기간의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들 산업 모두 원자재와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는데, 바로 ‘동일한 품질을 지닌 부품(혹은 원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금은방에서 한 돈짜리 반지를 살 때 24K나 18K 같은 순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 이게 어느 나라에서 채굴됐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마찬가지로 메모리용 반도체를 사용할 때, 그 용량만 관심이 있지 삼성전자가 생산했는지 아니면 마이크론이 생산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스마트폰을 구입한 소비자도 디스플레이가 LG디스플레이인지 아니면 중국 제품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문제는 ‘채찍효과’ 때문에, 원자재 시장이 대단히 격렬한 수요의 변동성을 보인다는 점이다. 손잡이를 조금만 휘둘러도 끝으로 갈수록 채찍의 움직임이 격렬해지는 것처럼, 소비자 시장에서 약간의 변화만 나타나도 원자재 가격이 급락하거나 급등한다. 그리고 오랜 기간에 걸쳐 투자해 생산설비를 깔았기 때문에 수요가 위축되더라도 쉽게 생산량을 조정하기 어렵다. 약간 손해를 보더라도 계속 생산한다는 의사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뜻이다.
물론 반대로 구리 값이 상승하는 등 세계 경제의 수요 개선 징후가 보이더라도, 한국의 수출이 바로 증가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수출 계약이 수개월 혹은 수년 전에 이뤄졌기에, 시차를 두고 수출 조건의 변경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구리가 한국 수출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구리가격의 변화에 끌려가고, 또 끊임없는 변동성이 노출되는 게 싫다면 세계적인 기업들이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00년 정보기술(IT) 붐 당시 세계 최고의 통신장비 제조업체로 부상한, 시스코는 약 석 달의 리드타임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리드타임이란 제품 하나를 생산하는 데 시작해서 출고에 걸리는 시간을 뜻한다. 조선 산업도 아니고, IT산업 부문의 기업에 석 달의 리드타임은 너무 긴 것이었다. 이렇게 리드타임이 길어졌던 것은 연이은 기업 인수·합병(M&A) 때문이었다. 강력한 수요에 대응해 연관 통신장비 기업들을 대거 인수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생산라인과 규격부터 시작해 각종 기술이 다른 회사들이 추가된다고 해서, 생산량이 늘어날 리는 만무했다.
결국 2001년부터 IT 경기가 무너지자, 시스코의 경영실적도 크게 악화됐다. 시스코는 자신의 고객들이 주문을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있었음을 그때까지 몰랐던 것이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시스코의 주문 적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세계 각국의 통신사들은 자신의 주문을 2배 혹은 3배 이상 부풀림으로써 약간의 물량이라도 받아가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금리 인상과 2001년의 대규모 테러공격으로 경기가 갑자기 식어버리자 고객들은 일제히 시스코에 대한 주문을 취소하기에 이른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여기에서 무너졌겠지만, 시스코는 수년에 걸친 구조조정과 경영전략 수정 끝에 지금도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일단 시스코는 화웨이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압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던 기업이었기에, 할인 판매 등을 통해 재고를 처분할 수 있었다. 즉 고객사 입장에서도 시스코 제품이라면 값이 쌀 때 사두려는 수요가 있었다. 두 번째 생존 요인은 1990년대 후반 상장에 성공하고 자금을 조달했기에, 막대한 자본을 보유했다는 점이었다. 이 덕분에 시스코는 생산 증가에 도움이 되지 않은 계열 회사를 대거 정리하고서도 현금을 어느 정도 남길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급주도 모형(Supply-Push Model)에서 수요유인 모형(Demand-Pull Model)으로 경영 전략을 수정했다. 공급주도 모형이란 생산계획에 근거해 판매하는 것을 뜻하는데, 시스코가 통신장비 회사를 대거 인수했던 것이 ‘앞으로 호황이 계속될 것’이란 판단에 기반했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반대로 수요유인 모형은 판매 계획에 따라 생산이 순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시스코의 회생 과정은 경기 변화에 영향받지 않고 안정적인 경영을 하기 위한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압도적인 경쟁력과 자금력, 그리고 오랜 기간 구조조정을 추진할 수 있는 경영진을 보유해야 한다. 더 나아가 시스코가 지금 세계 통신장비 업계에서 톱 레벨이 아니라는 것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공급주도 모형에 따라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화웨이가, 미국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세계 톱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 시스코의 길을 걸어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보다 다른 경쟁자에 비해 압도적인 기술 우위를 지닌 부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같은 경우만 보더라도 한국 기업이 독보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지만, 후동중화조선 등 중국 기업의 비중이 조금씩 높아지고 있다. 2018년 중국이 건조했던 LNG 운반선이 고장으로 폐선되는 사태를 겪었음에도 그러하다.
기술적 우위 이외에, 자본력과 경영진의 태도 문제도 시스코와의 차이를 인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세계적 기업들에 비해 한국 기업이 보유한 자금 여력은 부족한 편이며, 2010년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문제가 저축은행 사태로 비화된 끝에, STX와 동양증권 그리고 한진해운으로 이어지는 연쇄적인 기업 파산 사태가 출현한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아가 경영진이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꾸준히 구조조정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점점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앞으로도 구리 가격 등 한국 수출의 선행지표를 주기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최근의 구리가격은 천우신조 같은 느낌이다. PF 대출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계기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통신장비 제조업체였던 시스코는 2000년대 초반 정보기술(IT) 경기가 무너지자 경영실적이 크게 악화됐다. 하지만 장기적 비전을 가진 경영진의 수년에 걸친 구조조정과 경영전략 수정 끝에 굳건하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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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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