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아니라면 ‘당장’) 이 책이 당신 손에 들려지길 바란다. 무엇을 다룬 소설인지 모른 채, 그저 잘 알려진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자는 가벼운 계획으로. 어떤 책은 그 정도의 동기가 책을 마지막까지 읽게 한다. 힘주어 아플 준비는 책을 마친 뒤 제대로 하면 되니까.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사실과 현상에 파고들기를! 올곧게만 살기는 쉽지 않아서 타협하고 싶어지는 오늘의 당신 발치에 걸리는 조약돌인 듯 슬며시 놓여도 좋겠다.
힘들어 몇 번쯤 그만두었다가 책 속 인물들에 대한 책임감으로 겨우 읽어냈다는 독후감을 들었다. 동호, 정대, 은숙, 선주, 진수와 영재, 정미… 어둠 안에서 깨어 있는 인물들을 향해 독자는 무거운 짐을 지듯 힘겹게 페이지를 넘겼을 것이다.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아들의 학생증 사진을 들여다보며 동호야, 소리 내 불러보는 어머니가 다시는 “밝아지지 않는 저녁 속에서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자는” 모든 저녁의 시간을 사는 동안, 이 책을 읽게 될 당신도 빈 음료수병에 양초를 넣어 시신들의 머리맡에 놓아주던 동호의 손길을 안간힘으로 함께 밝히게 되리라.
허리에 총알구멍이 뚫리는 정대를 보고도 뒤돌아 도망친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자책하던 동호도, “군대가 들어오면 너희들은 무조건 항복해라, 살길을 찾아!” 진수형이 말했지만, 나란히 두 손 들고 항복 자세로 걸어 나오던 소년들도 “존나, 영화 같지 않냐?” 하는 대사와 함께 사살당했다. 믿을 수 있을까. 군인에게 총살당한 시민들의 시신을 태극기로 감싸 친친 두르고, 애국가를 부르던 그 도시의 열흘을.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설은 질문한다. 피범벅이 될 때까지 머리를 후려치고, 함부로 튀어 오르는 주검들의 팔다리를 2인 1조로 트럭에 던져 넣는 손과 위험 속에서도 헌혈을 하기 위해 끝없이 병원 앞에 줄을 서던 사람들의 동동 구르는 발이 모두 ‘인간’이란 진실을 이해하기 위해 분투한다.
“분수대에서 물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벌써…” 유월의 분수대가 뿜는 눈부신 물줄기를 보고 민원을 넣던 은숙과 이제 학생도 그만 잊으라고 응대하는 도청 여사무원의 갈라지는 목소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은숙이 검열실에서 먹선이 그어지다 못해 어떤 데는 롤러로 페이지 전체를 검게 밀어버린, 본문 없는 원고를 되돌려 받는 당혹감. 남겨진 현실에서 인물들은 헛수고처럼 노력한다. 이해하려고, 이해해 보려고, 그날 그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숯이 되어 돌아온 원고는 놀랍게도 무대연극으로 공연되었다. 배우들은 대사를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표정과 입 모양으로만 부르짖는다. 검열의 불길에 소각되었던 목소리는 극도로 집중하는 관중과 배우의 눈빛 사이에서 되살아나 진동하며 극장 가득 메아리친다. 먼 곳의 그날에서 오늘로, 소년이 오는 길을 연다.
쓰면서 작가는 많이 아팠다고 한다. 압도적인 고통 속에서 울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고. “너를 보내지 못해 평생이 장례식이 되어 버린” 망자와 산자의 매듭 짓지 못한 이별을 위해 작가는 자청하여 곡비(哭婢)가 되었다. 유성호 평론가는 “초혼 제의를 치르는”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이 “그때 참혹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사건의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항쟁의 위대한 주체였음을 증언하고 있다”고 평했다. 오늘의 오월에 이르기까지 고단한 시간을 꿋꿋이 살아낸 그분들께 이제 그만 용서하고 자신의 인생과 화해하길 바란다고 위로하고 싶지만, 용서를 비는 사람이 없는데, 누구를 용서하라고 말해야 할까. 다만 책임의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려 자살하는 생존자들이 더 이상 없기 만을 바라고 바란다.
동호와 정대가 살던 집 따뜻한 마당을 그려본다. 희고 견고한 시멘트벽 기어올라 총총히 맺힐 오월의 붉은 장미를 생각한다. “엄마아,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햇살 밝은 곳으로 엄마의 손을 이끄는 너를 가만가만 따라간다. 동호야…, 부르면 꼭 돌아봐 줄래?
*신형철 산문집, 한겨레출판
정혜선
●2014년 <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
●2015년 계간 문학지 <포엠포엠> 신인문학상
●2023년 제 2회 정지용 해외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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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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