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고추장의 전성시대가 찾아왔다. 드디어 서양 요리 세계에 고추장이 녹아들었다는 말이다.‘뉴욕 타임스 쿠킹’이나‘아메리카스 테스트 키친’ 등 공신력 있는 요리 사이트의 움직임을 보면 알 수 있다. 고추장을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활용하는 레시피를 하나둘씩 선보인 지가 5년은 족히 넘었다. 고추장의 대표적 용례는 구이용 양념이다. 닭다리 살이나 연어 등에 발라 굽는, 전분으로 인한 고추장의 점성을 잘 활용하는 레시피가 가장 흔하다. 종종‘고추장을 저렇게도 먹는다고?’라는 인상을 풍기는 레시피도 있지만 그마저도 긍정적이다. 한국계 미국인 셰프 데이비드 장의 말을 빌리자면, 오히려 고유의 식재료가 아니기에 서양인들은 우리처럼 식재료와 조리법의 정서적 제한에 얽매이지 않는다. 맛있을 것 같으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쓴다는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많은 고추장 레시피가 서양인들에 의해 적극 소개되고 있다. 비단 한국계 요리사들에게만 쓰임새가 국한되지 않는다. 이 덕분에 고추장은 서양 특히 미국에서 핫소스 삼국지의 지평을 새롭게 열어나가고 있다. 최근까지 타바스코(미국)와 스리라차(베트남)의 동서양 양강구도였던 핫소스 세계에 비집고 들어가 지분을 확실히 마련한 것이다.
이처럼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는 핫소스 삼국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 식탁의 지평을 넓힐 기회도 보인다. 고추를 빼놓고도 각각 다른 재료와 제조법 덕분에 핫소스와 스리라차, 고추장은 맛과 질감이 달라 쓰임새도 조금씩 세분된다. 결국 고추장 외의 두 소스를 더 잘 이해한다면 우리 맛의 지평도 더욱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삼국지를 새롭게 써 나가고 있는 세 핫소스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자.
■서양 원조 핫소스, 타바스코
우리에게도 피자집 식탁의 단골 조연으로 익숙하디 익숙한 타바스코 소스(사진=아마존 홈페이지 캡처)의 역사는 최소 155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1868년 메릴랜드주 출신의 전직 은행원 에드먼드 매킬레니가 타바스코 고추를 활용해 최초로 핫소스를 개발했다. 하지만 많은 유서 깊은 음식이 그렇듯 타바스코 또한 원조 논란이 있다.
제프리 로스페더의 저서 ‘매킬레니의 황금’에 의하면 이미 그보다 이십 년 앞서 마운셀 화이트가 타바스코 고추를 경작했다는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정치인이자 농장주였던 화이트는 푸짐한 저녁 정찬 파티로 이름을 날렸다. 루이지애나주는 프랑스에서 매입한 영토(1803)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화이트의 파티에는 유럽부터 케이준(서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루이지애나의 요리 세계), 카리브해의 영향을 두루 받은 요리들을 선보였다. 그런 가운데서도 멕시코 타바스코주가 원산지인 고추로 만든 매콤한 소스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이 소스가 화이트의 식탁에 등장한 게 1849년이니 매킬레니를 이십 년 앞서갔다는 것이다. 원조 논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니, 화이트가 1862년 임종 자리에서 매킬레니에게 타바스코 고추와 더불어 레시피를 주었다는 이야기마저 있다.
이처럼 매킬레니 가문이 타바스코 소스의 원조가 아닐 수는 있지만, 이후로는 대를 물려가며 오늘날까지 아성을 꾸준히 지키고 있다. 오늘날도 타바스코 소스는 루이지애나 에이버리섬의 같은 공장에서 제조된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수요 확보를 위해 타바스코 고추는 전 세계에서 위탁 재배가 이루어진다. 에이버리섬의 본사에서 종자를 키워 전 세계로 보급하는 방식이다. 고추는 수확한 날 갈아 오크통에 담가 최소 3년 이상 숙성시킨다.
위스키를 빚는 데 썼던 술통을 재활용한다. 재활용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을렸던 술통 내면을 전부 벗겨내고 다시 불로 지져 쓴다. 고추와 소금, 식초 세 가지 재료로만 만드는 타바스코는 신맛과 매운맛의 균형 덕분에 한식에서는 특히 감자요리와 아주 잘 어울린다.
■ ‘수탉 소스’ 스리라차
원래 스리라차 (사진=아마존 홈페이지 캡처)는 태국식 매운 양념장을 일컫는 일반 명사이다. 1940년대 태국의 시 라차()라는 지역에서 타놈 차카팍이라는 여인이 고안했는데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1900년대 초반부터 광둥에서 이민 온 중국인들이 만들어 판 고추마늘소스(수안롱라조장, 蒜蓉辣椒酱)에서 가지를 쳐 나왔다.
그런 가운데 미국을 비롯한 서양에서 스리라차는 베트남의 소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계 이민자 데이비드 트란의 후이 퐁(Huy Fong) 브랜드의 인기가 높기 때문이다.
중국계 베트남인인 트란은 베트남전 직후 ‘보트피플’로 1979년 봄, 미국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이미 로스앤젤레스에 자리를 잡은 매형에게 고추 이야기를 듣고 이주해 자신의 핫소스 회사를 차린다. ‘후이 퐁’은 그가 미국에 타고 왔던 화물선의 이름이다.
후이 퐁 스리라차 소스가 명성을 얻고 뿌리를 내리게 된 건 브랜딩 덕분이다. 트란은 1945년생인 자신의 띠에서 착안해 수탉을 브랜드의 상징으로 삼았다. 제품의 병에도 이 수탉을 눈에 확 들어오게 했다. 덕분에 후이 퐁 스리라차는 ‘수탉 소스’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소스의 붉은색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선명한 녹색의 병뚜껑도 브랜드의 각인에 영향을 미쳤다.
가업으로 꾸준히 입지를 넓혀 온 ‘수탉 소스’는 요즘 수요에 맞는 물량을 대지 못하고 고전하고 있다. 고추 재배자와 분쟁이 난 탓이다. 후이 퐁은 미국 캘리포니아의 언더우드 농장과 1988년부터 계약 재배 관계를 이뤄왔었다. 스리라차의 주재료인 붉은 할라피뇨 고추를 언더우드 농장과 계약해 공급받아 농장의 재배량 가운데 90%를 가져갔다.
그런 두 기업의 관계가 2016년 틀어졌다. 후이 퐁이 농장의 최고운영책임자를 빼내 오려다가 두 사업체 사이의 신뢰가 깨졌다. 법정 공방이 벌어졌는데 언더우드 농장이 승리해 2,330만 달러(약 309억 원)를 후이 퐁에 받아냈다. 그리고 2022년 6월, 후이 퐁은 스리라차 소스의 생산을 잠정 중단했다. 멕시코 등에서 수급하는 고추의 조달이 원활하지 못한 탓이었다.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의 고추장
당연하게도 고추장은 고추의 도입 이후에 고안됐다.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 고추가 일본에서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임진왜란 이전으로 예상한다. 다만 고추장 제조법이 기록된 최초의 문헌은 ‘증보산림경제(1766)’로 시차가 다소 있다.
메주를 가루로 만들어 체로 친 것 1말, 고춧가루 3홉, 찹쌀가루 1되에 좋은 간장을 더해 담근다고 기록돼 있다. 오늘날의 고추장과 흡사하나 고춧가루의 양이 훨씬 적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는 점에서 다르다.
한편 ‘규합총서(1809)’에는 또 다른 조리법이 남아 있다. 삶은 콩 1말과 쌀 2되로 흰무리를 쪄서 함께 찧어 메주를 만든다. 이를 띄워 가루를 내고 소금 4되를 좋은 물에 타서 버무린다. 그리고 고춧가루 5~7홉을 섞고 찹쌀 2되로 밥을 지어 한데 섞어 완성한다. ‘증보산림경제’의 조리법에 비해 고춧가루의 양이 많아지고 메주에도 쌀을 더하는 등 제조법이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고추장은 다음과 같이 만든다. 찹쌀 5되를 가루 내 경단처럼 반죽하여 큼직하고 얄팍하게 빚어 끓는 물에 삶아낸다. 2되 정도의 메줏가루와 2홉의 엿기름에 체에 밭친 물을 붓고 농도를 맞춰 잘 으깬다. 이 둘을 함께 섞은 다음 고춧가루 3되를 더해 색을 조절하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어린 시절 스승 무학대사를 찾아 순창군의 만일사를 찾아가던 중 농가에서 먹은 고추장을 잊지 못해 진상을 명했다는 순창 고추장이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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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음식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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