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탈탈 돈 세던 기계가 삑삑 소리 내며 멈춘다. 불순분자를 잡아냈으니 적의 조치하라. 대개는 지폐가 접혀서 인식불능인 경우라 잘 펴서 다시 얹으면 된다. 문제는 돈에 낙서를 한 경우. 다시 돌려도 거부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짜증이 난다.
영화 ‘세런디피티’에서처럼 연락처를 적어 운명을 시험하는 건가. 흔하기는 1불짜리에 ‘Where’s George’ 도장을 찍어 돈이 어디서 어디로 돌고 도는지 추적하는 놀이가 있다. 웹사이트나 앱에서 스탬프 찍힌 지폐의 일련번호를 입력하면 돈의 나그네 인생(?)이 보인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오늘 검거된 지폐는 20불짜리로 뒷면의 ‘In God We Trust’ 문구를 ‘In Reason We Trust’로 덮어씌운 것이다(사진 위). 정교분리의 원칙과 상치된다는 오래된 시비. 미국은 기독교의 나라? 아니라는 주장을 남들 다 볼 수 있게 돈에다 새기는 것이다. 수정헌법 1조 표현의 자유다.
법정 화폐에 손상을 가하는 것은 불법 아닌가? 액면과 일련번호를 훼손하지 않는 한 괜찮다. 일종의 장식, 데커레이션이라는데 뭐라 제재할 길이 없다. 다만 자기 이익을 위해 상호나 상품 이름을 적으면 안 된다.
여기에는 주로 정치적인 주장이 담긴다. 특히 가장 흔한 20불 지폐가 그런 전쟁터이다. 인디언을 강제로 몰아낸 앤드류 잭슨의 초상 대신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의 해리엇 터브만을 넣자는 논쟁이 그것이다. 잭슨의 백인 남성 얼굴을 노예해방의 상징인 흑인 여성 터브만으로 둔갑시키는 스탬프가 있다. 이 얼굴 바꾸기는 트럼프 집권시 무산될 뻔 했다가 다시 추진되었는데 절차상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2030년에 가면 볼 수 있을 듯.
하여간에 미국은 목소리가 다양하니 요란하다. 돈 세는 데 불편하다고 툴툴대는 나 같은 인간이 있는가 하면 자기 주장을 펼치려고 20불 들여 스탬프를 사는 사람이 있다. 수요가 있으면 거기에는 장사꾼들이 꼭 끼어드는 법이고.
아예 가짜 돈으로 돈을 버는 자들도 있다. 위조지폐는 워낙 중대한 범죄이니까 범법의 경계선상에서 잔머리를 굴린다. 영화 찍는 소품(prop movie money)이라고 핑계를 앞세워 가짜 돈을 파는 작자들이다.
앞면 ‘United States of America’ 자리에 ‘For Motion Picture Use Only’(영화 제작용으로만 사용할 것)이라고 인쇄하고 백달러 속 벤자민 프랭클린, 오십달러 속 율리시스 그랜트의 초상을 살짝 변조해 놓았다. 뒷면 문구의 하느님(God) 자리에는 ‘복사 지폐(Copy Bill)’를 넣고(사진 오른쪽).
이걸 누가 속을까 싶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일이 꼬이려면 뭐에 씌인달까, 그런 날이 있지 않나. 얼핏 보면 크기와 색상, 디자인이 똑같아 진짜 돈인 줄 알고 받아서 거스름돈을 내주는 낭패를 겪는다. 다행히 진짜 돈이 아닌 걸 알아차리면 손님은 “아, 몰랐다” “나도 은행에서 찾은 돈”이라고 오리발을 내민다.
이런 가짜 돈을 만들어 인터넷에서 파는 업자들이 범법으로 처벌되는지 여부는 모르겠다. 위조지폐 유통이 아니고 영화소품으로 판 것이라고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뒀겠지. 사간 사람이 위폐로 쓴 것까지 자기네 책임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유사한 행태로 음주 연령 미만의 아이들이 온라인에서 사는 가짜 운전면허증에도 자세히 보면 깨알 같은 활자로 ‘기념품(souvenir)’이라 박아놓는 경우가 있다. 하여튼 사기꾼들의 잔머리 굴리기란. 내 눈에 걸리면 한 대 쥐어박고 싶다.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화요일 교육섹션에 정재욱 씨의 글 연재를 한다.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나눈다. 이 글 시리즈의 현판 ‘워싱턴 촌뜨기’는 미국의 수도에 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촌뜨기 신세’라는 작가의 뜻에 따라 붙였다. <편집자 주>
<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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