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미드윌셔 길에 아주 괜찮은 현대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게스’ 청바지 재벌인 모리스와 폴 마르시아노 형제가 개관한 ‘마르시아노 아트 파운데이션’(Marciano Art Foundation)이 그것이다.
MFA 뮤지엄의 오픈은 화단의 큰 경사였다. 우선 윌셔 중심가에 20년 넘게 비어있던 ‘스카티시 라이트 메이스닉 템플’(Scottish Rite Masonic Temple)을 근사하게 복원한 것에 찬사가 쏟아졌다. 이 템플은 1961년 비밀조직 프리메이슨이 지어 사용해온 유서 깊은 건축물인데 1994년 폐쇄된 후 조닝 문제로 부동산 매매가 어려워 오랫동안 유령처럼 서있었다.
마르시아노 형제는 2013년 이 건물을 800만 달러에 사들여 유명건축가 쿨라파트 얀트라사스트에게 개조를 위임했고, 얀트라사스트는 건물 외벽의 대리석 조각물과 벽화 등 오리지널 디자인을 살린 채 3개 층에 각기 다른 갤러리 공간을 조성함으로써 전통과 역사가 조화된 세련된 미술관으로 재탄생시켰다.
개관하자마자 MFA는 모카(MOCA), 브로드(The Broad), 해머(Hammer) 등 LA의 다른 현대미술관들과 비견되는 중요한 뮤지엄으로 떠올랐다. 컬렉션이 2000년대 이후 수집한 작품만 1,500점이 넘어 젊은 컨템포러리 아트의 최전방을 망라하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이 미술관을 좋아해 자주 찾았는데 그 이유는 한인타운에서 가까운데다 규모가 크지 않아서 부담 없이 들러보기 좋고, 건축물 자체가 주는 특별한 아우라 때문이었다. 게다가 입장이 무료이고 주차장은 널찍하며 시간예약제로 관람객을 제한하고 있어 언제나 분위기가 쾌적했다.
그런데 그렇게 화려하게 등장했던 MFA는 개관 2년반 만인 2019년 11월 갑자기 문을 닫아 화단을 충격에 빠트렸다. 아무런 사전조짐 없이 갑작스레 영구폐관을 선언했는데, 이는 미술관 직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모임을 가진지 하루 만이었다. 70명의 직원들은 저임금과 노 베네핏, 불합리한 근로시스템 등 주먹구구식 운영에 불만을 품고 노조를 설립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MFA 폐관의 배경에 대해 업계에서는 노조 사건은 기폭제가 됐을 뿐,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이 미술관은 이사회도 없고, 기부금 출연도 없었고, 관장과 큐레이터도 없이 출발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진지한 애정 없이 블루칩 작품들을 수집해온 마르시아노 형제가 장기적인 계획과 비전 없이 비영리기관에 대한 세제 혜택만을 노리며 사립미술관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2015년 ‘더 브로드’를 개관한 일라이 브로드처럼 문화예술계의 영웅이 되고 싶은 허영심도 한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뮤지엄은 부자들의 장난감이 아니고, 비영리기관의 운영은 사기업과는 차원이 다른 조직과 전략, 투명한 재정관리를 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공에 대한 교육과 기여가 있어야하는데 MFA는 이 부분이 크게 결여된 점이 문제였다. 그런데다 뮤지엄을 좌지우지하는 모리스 마르시아노의 충동적이고 독선적인 성격, 예술감독이라고 들어온 그의 딸 올리비아(27)의 오만방자함이 직원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기대보다 저조한 관람객 수, 쉽지 않은 운영, 거기에 노조까지 들썩이며 골치가 아파지자 마르시아노는 장난감 던져버리듯 폐관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문을 닫아버린 MFA가 얼마 전 이름을 바꾸고 다시 전시를 열고 있다고 해서 지난주 방문했다. 폐관 후 3년반 만이다.
새 이름은 ‘가고시안 마르시아노’(Gagosian at Marciano Art Foundation, LA). 세계 최대의 현대미술 전문화랑 ‘가고시안’이 MFA의 1층 대형 전시공간을 독점계약 했다고 한다. 래리 가고시안은 미국, 유럽, 아시아에서 갤러리를 19개나 운영하는 글로벌 메가 딜러이며 마르시아노 형제의 컬렉션을 오랫동안 관장해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980년 베벌리힐스에 LA의 첫 갤러리를 열고 장 미셸 바스키야의 전시를 유치하여 대박을 친 후 화단의 큰손으로 성장했는데, 이번 MFA와의 계약으로 LA에 두번째 전시장을 마련한 셈이다. 1만3,000스케어피트나 되는 대형 공간이라 웬만한 곳에서는 유치하기 힘든 큰 기획전의 전시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 GMFA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는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생존 작가의 한 명인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엑소더스’(Exodus), 작년 11월부터 뉴욕과 LA에서 동시에 선보이고 있다. 키퍼는 전후 독일의 정체성과 문제의식을 다룬 작업들로 지난 50여년 화단에 큰 영향을 미쳐온 작가로 게르만 신화, 역사, 문학, 연금술에서 영감을 얻고 다양한 재료를 변형시켜 층이 두꺼운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출애굽기를 상징하는 이 전시에서도 흙과 재, 나무, 납, 지푸라기, 철사줄 등을 붙이고 쌓고 긁어내고 덧칠하여 형성한 대작들에서 두툼한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가로세로 8~9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이 압도적인데 광야의 구름기둥, 지상과 천상을 잇는 사닥다리, 홍해가 갈라지며 패망한 파라오를 상징하는 조각배 등이 인간의 삶과 죽음, 보속과 구원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러니까 뮤지엄은 사라지고 갤러리가 들어선 것이다. 뭐가 어찌됐든 훌륭한 전시공간이 살아난 것은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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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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