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을 목전에 둔 어느 주말, 학과장님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제목은 자그마치 “3년차 리뷰 결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에 쉽게 이메일을 열어 볼 수가 없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정신이 없던 학기를 마치기 바로 직전, 간만에 누려보는 약간의 여유로운 일요일 오전에 이런 이메일이라니. 주말에 업무관련 카톡을 받는 회사원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하는 마음으로 그 이메일을 무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아예 이메일이 온 것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내 마음은 그 이메일을 반 쯤은 열어 본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이럴 때면 스마트폰의 알람 설정을 바꾸어 놓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후회가 된다.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하고, 책상과 거리를 두고, 갖가지 핑계를 대며 두어 시간 동안 이메일을 무시해 보려고 온갖 힘을 다 한 후, 나는 이 상황을 돌파하기로 한다. 그래도 첨부파일을 바로 열어 보기에는 내공이 아직 덜 쌓인 나이기에 본문의 주요 내용을 이메일과 내외하는 듯 마냥 조심스레 읽어보니 마지막 줄의 미팅 요청이 눈에 뜨인다. “은정, 3년차 평가는 아주 좋았어. 우리 곧 만나서 너의 3년차 평가에 대해서 얘기를 좀 나누어 보는게 어떨까?”
6-7여년이 걸리는 정년 심사 과정 중에 있는 조교수는 정년 심사를 통과하기 전까지 임시직이나 다름이 없다. 그 준비 과정을 돕기 위해 각 대학마다 중간 인사평가 같은 제도가 있는데, 이것이 3년차 리뷰이다. 3년차 리뷰를 받기 위해서는 임용이 된 후3년차 첫 학기전까지, 지난 2년간 내가 쓰고 참여했던 모든 논문들, 그리고 다른 작업물들과 함께 교수 평가 자료 및, 내 전문분야에 충분히 기여하고 있는 지를 보여줄 모든 증거물들을 제출한다. 여기에는 논문의 복사본이나 학교에서 학기 말마다 실시하는 교수 평가 자료와 같이 공적인 문서와 함께, 학생들의 감사의 메시지나, 논문이나 연구에 대한 누군가의 격려의 말이 담긴 이메일이 포함되기도 한다. 그 수많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동료들은 피드백을 준다. 이 리뷰가 정년 심사 준비를 잘 하고 있는 지의 근거가 되고, 이 과정에 참여 함으로서 훗날 정년 심사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3년차 리뷰의 목적인만큼 중요하고 부담이 많은 작업이기도 하다.
취업을 위해 냈던 자기 소개서, 교수 철학서, 그리고 논문을 빼고는 내가 작업했던 것의 총체를 모아서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불안감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이 불안감을 이겨내는 것도 정년 심사를 거치는 자의 중요한 자질인 것일까?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문건을 만들어 보내고 나니 그 문서들이 나이고 나의 가치는 그 문서에 포함 된 것으로만 인식되는 것만 같았다. 평가를 받기도 전에 내 마음은 타고 나버린 잿더미 마냥 형태를 알 수 없는, 손 대면 바스락, 하고 사라질 무언 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일과 나를 분리해야 한다고 수없이 말을 해도 이런 과정 하나를 마치고 나면 곧 일이 나이고, 내가 일이 되어 버리고 만다.
떨리는 마음으로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결과는 사실 나쁘지 않았다. 나의 동료들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내 작업들을 정성 들여 읽고 내가 보지 못한 내 연구 결과물들 사이 연결고리들을 보고 있었다. 내가 하는 작업과 연구를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강조하는 피드백이었다. 아무리 같은 과이고 같은 분야에 있는 동료들이라고 해도, 본인의 전문 분야가 아닌 글을 읽게 되면 어떻게든지 품이 들게 마련이다. 수 십년동안 지켜온 지극히 개인 주의적이고, 성과 중심의 획일화 된 기준과 문화가 우세한 보수적인 대학이란 곳은 유색인종과 비서구권 문화에서 향유되는 가치들을 중요시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더욱이 공정하지 못하고 가혹한 곳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동료들이 써 준 피드백을 보며 나의 연구과 작업물에 자신없어 하며 나를 다그치기만 했던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마음이 뜨거워졌다. 내가 자신있게 내밀지 못하는 내 연구들 사이에서의 선을 나의 동료들은 내 손을 잡고 젠틀하게 그어주고 있었으니 말이다.
영국의 인류학자인 팀 인골드(Tim Ingold)는 우리의 삶을 동사를 중심으로, 멈추어 있는 상태의 것이 아닌, 항상 변화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작은 것들은 우리가 기억하는 인생의 중요한 점들로 인식이 되고, 그 점들이 모여 결국 선이 된다. 3년차 리뷰를 마치고 숨 고르기를 하며 2022년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내가 모아온 점들이 어떤 선을 그려왔는지 생각한다. 일이 내 자신은 아니지만, 나의 자랑스런 일부로 만들어 가고 싶은 지금, 이 점들과 선이 어떤 면을 그리게 될까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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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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